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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Oct 13. 2023

목우씨의 산골일기(146)

제146화 : 그림자가 없다


          * 그림자가 없다 *


  “아니 목우 선생님 그림에는 왜 늘 그림자가 빠져 있지요? 스케치엔 그림자가 있어야 명암이 뚜렷해지고 그림이 한결 살아나는데...”


  요즘 갈수록 기억력이 쇠퇴하는 것 같아 걱정이다. 남들이야 그 나이가 되면 기억력 나빠지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지만. 헌데 어머니가 치매를 10년 넘게 앓다 돌아가셨고, 누님 한 사람도 초기 진단을 받았다. 즉 가족력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눈이 아주 나쁜데도 시 배달을 멈추지 않고 있는 까닭을 묻는 이에게 답할 때마다 꺼내는 핑곗거리가 바로 '치매 예방'이다. 처음 시 배달은 학교에서 메신저를 통해 희망하는 선생님들께 보냄으로 시작했다. 허니 20년 가까이 된다.

  그러다 카카오톡ㆍ 카카오스토리가 나오면서 거길 통해 아는 이들, 혹은 모르는 글벗들에게도 배달했다. 아는 이들이 글 읽고 칭찬해 주는 말에 기분 좋아 계속 배달했으며, 모르는 이들 역시 공감해 줄 때는 얼마나 기뻤던가.


(추석날 아침, "아버지 아 아버지"에 관한 추모의  글에 달린 한 글벗의 카톡 댓글)



  워낙 끈기 없고 싫증 잘 내는 성격이라 10년이 지날 즈음 기억력의 감퇴도 느껴 그만두려다, 글쓰기가 기억력 감퇴를 늦추는데 효과적이란 말에 계속 붙잡았다. 허나 3년 전 잘 아는 신경과 의사랑 얘기 나누다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다른 이에겐 모르나 내게 글쓰기는 큰 도움 안 된다는 사실.
  국어교사란 직업 때문에 평생 글과 더불어 살아왔으니까 글쓰기가 두뇌 활성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다. 같은 일의 연장이라서. 그럼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으니 예전 직업과 거리가 먼, 예를들면 손으로 하는 취미를 가지라고 했다. 목공이든, 그림 그리기든, 아니면 골프든.

  골프는 돈이 들고, 목공은 수시로 집에서 하면 될 터. 그러다 그림 그리기에 꽂혔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강좌가 있는가 하여 알아보니 마침 눈에 띄었다. 「어반스케치」와 「마음치유를 겸한 그림책 만들기」. 9월 초에 시작했으니 고작 네댓 번밖에 안 받아봤으나 상당히 도움 된다는 걸 느낀다.
  다만 워낙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없는 데다 다른 분들은 나처럼 완전 초보가 없고 서양화든, 동양화든, 민화든, 그리기 기초가 어느 정도 돼 있었다. 원래 못하는 일은 잘 덤벼들지 않는 성격이라 그림은 생짜 초보에 뒤쳐지니 남들 따라가기에 스트레스 안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반스케치 3개월 배운 분의 그림이라니... - 구글이미지에서)



  지난 ‘어반스케치’ 강의 시간에 선생님께 들은 말이 서두에 나온 ‘그림자를 넣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다른 분들 스케치를 슬쩍 훔쳐보니 정말 그림자가 뚜렷하다. 원근과 명암을 제대로 못 넣음은 소실점(消失點)을 찾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평행하지만 눈으로 볼 때는 그렇지 않은 직선 둘을 연장했을 때 하나로 만나는 점을 소실점(또는 소점)이라 하지만 뭔 말인지 아직 잘 모른다. 예전 댄스스포츠 배울 때도 강사는 늘 ‘리듬을 타라’고 하는데 '리듬을 타다'란 말뜻을 이해 못 했듯이.


  확실히 남들이 그린 우수한 스케치 작품을 보면 그림자 처리가 뚜렷해 왜 선생님이 그림자를 강조하는지 알 것만 같다. 모든 사물엔 그림자가 있건만 사람도, 건물도, 나무도 그림자 없이 그리려 했으니 지적받음은 너무나 당연.
  그러고 보니 우린 해 때문에 생기는 그림자 말고 ‘그림자’란 말을 종종 쓴다. '나는 그대의 그림자로 살고 싶다'에서 보다시피. 사람 뒤에 생기는 그림자뿐 아니라 사람 사이에도 그림자가 있다. 자식과 나 사이를 봐도 그렇다.


(남의 그림을 베껴 그린 최초의 작품)



  한때 나는 자식들에게 '기둥'이었다. 이제는 기둥 자리에서 물러나 그림자 자처한 지 오래. 아들과 딸을 만나 얘기할 때마다 나는 작아지고 걔들은 점점 커져간다. 또 걔들이 내게서 얻는 것보다 내가 얻는 게 더 많다.
  기둥 자리에서 물러나 그림자가 됐다고 하니 한편 서글프기는 하다. 허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잠깐 사라졌다가도 다시 나타난다. 그림자는 그늘을 만들지만 언제나 그의 앞에 서기보단 뒤에 서 있으면, 굳이 그늘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우리 집 자랑 가운데 하나가 100년 된 뽕나무다. 오디철만 되면 그걸 줍느라 힘들지만 한 번씩 볼 때마다 참 자랑스럽다. 이른 봄엔 뽕나무 그늘이 얼마 안 되나, 여름에 가까워지면 푸른 잎이 우거져 그늘(녹음 : 綠陰)을 만든다. 그리고 그때 그늘은 시원함을 주니까 아주 바람직한 그림자가 된다.
  겨울엔 뽕나무 가지가 그림자를 만들어 싫지만 그래도 잎이 다 떨어져 만드는 범위가 얼마 안 되니 뽕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렇게 그림자는 깜냥껏 늘이기도 줄이기도 한다. 그저 따라가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는 존재다.


(딸이 동생과 함께 찍은 어릴 적 사진을 보고 그린 작품)



  이젠 사회에서도 빛을 내고 살기엔 틀렸다. 그림자로 살아야 하는데 그게 다만 나쁜 일만은 아니리라. 우리 집 뽕나무처럼 그늘이 필요할 때는 늘였다가, 필요 없을 땐 줄이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나름 의미 있는 삶 아닌가.
  그림 배우려 다니며 얻은 ‘그림자’의 의미. 그래 이제부터 스케치에도 그림자를 넣어야 하겠지만 삶에도 그림자를 넣어야 하지 않을까.


  *. 커버 사진은 우리 집 100년 된 뽕나무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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