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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Nov 02. 2023

목우씨의 긁적긁적(63)

제63화 : 그냥

           * 그냥 *



  아주 오래전에 인문고에서 논술을 가르쳤다. 그때 첫 수업할 때면 도입 단계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꼭 던졌다.


  자 사랑하는 남녀가 아래처럼 얘기를 나눈다고 치자.

  “자기, 나 좋아해?”

  “응.”

  “왜 좋아하는데?”

  “그냥...”

  “그냥 좋아하다니...”

  “정말 그냥 니가 좋아.”


  그럼 이런 대화가 현실에 가능할까 하고 물으면 대답은 대부분 가능하다 말한다. 왜냐하면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많이 들어보았을 테니까. 이처럼 현실에선 ‘그냥’이란 말이 통한다. 그런데 논술에선 절대로 안 된다. 논술에서 ‘논(論)’은 ‘논리적’이라는 뜻이다.

  논리적이 되려면 '그냥'이란 말 대신 ‘네가 이뻐서.’ ‘네 성격이 좋아서.’ ‘네 집이 부자라서.’라는 뒷말을 붙여야 한다. 그러고 보면 아마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가장 비논리적인 낱말이 '그냥'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말을 많이 사용한다.



  며칠 전 오랜 벗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주 예전에 사귄 벗이건만 사는 곳, 하는 일이 다르다 보니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렵고 하여 전화로 대충 때운다.

  벗이 물었다.

  “요즘 우찌 사노?”

  “그냥 살지, 뭐.”

  이번엔 내가 물었다.

  “너는?”

  “나도 그냥 그대로야.”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마음을 놓았다. 아마 벗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냥’

  어찌 들으면 참 줏대 없는 말이다. 내 의지 없이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뜻이니까. 허나 솜솜 뜯어보면 참으로 속 깊은 뜻을 담은 말이다.

  앞에 사랑하는 남녀의 대화 형태로 돌아가 보자.

  “자기 나 좋아?”

  “응.”

  “얼마큼?”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냥 니가 좋아.”


  이 대답에 발끈하는 여자는 ‘그냥’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이때의 ‘그냥’은 어떤 계산도 없이, 어떤 비교도 없이 순수한 그대로의 그대를 사랑한다는 뜻이니까. 멋진 미사여구를 섞은 표현보다 더 담백하면서도 사랑의 무게감을 주는 말이 아닌가.

  또 엄마 아빠가 자기 볼을 아기 볼에다 비비면서, “우리 아기, 그냥 이대로 곱게 자라주렴.” 할 때의 ‘그냥’은 아무 탈 없이, 속 썩이지 말고, 착한 사람으로 무럭무럭 자라 달라는 바람이 담겨 있다.



  “그냥 있어도, 그냥 생각만 하여도, 가슴 설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할 때의 ‘그냥’은 내 마음속에 언제나 그(그녀)는 살아 숨 쉬는 존재란 뜻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내다 어떤 사유로 하여 사이가 나빠져 소식 끊고 지내던 이에게서 모처럼 전화가 와 받았는데,

  “그냥, 전화했어.”

  이때는 말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여기서의 ‘그냥’은 예사 ‘그냥’이 아니다. 망설이다 망설이다 자존심을 죽이며 관계 개선을 위해 보낸 거니까.


  며칠 전 전화에서 친구의 대답인 ‘그냥’은 작은 사업하던 중 코로나로 하여 힘들었는데, 현재는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는 답이고, 나의 대답인 ‘그냥’은 산골에 처박혀 자연인처럼 살고 있지만 나름대로 잘 살고 있으니 염려 말라는 뜻이 담겼다.


  올 한 해 시작한 지 몇 달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한 해가 다 지나간다. 그동안 누가 어떻게 지냈느냐 물으면 '그냥'이라 답할 것 같다. 참 싱거운 대답 같아 보이지만 어쩜 이 표현만큼 의미심장한 답이 또 있을까. 특별한 성취는 없으나 별일 없이 넘어왔다는 뜻이며, 남은 날도 '그냥' 그렇게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담겼으니까. 그래서 앞으로도 종종 '그냥'이라 답할 수 있으면 좋겠다.


  끝으로 아주 오래전에 쓴 글 - 시라 썼지만 시가 아닌 것 같은 - 한 편 띄운다.


    - 그냥 있어도 -


  그냥 있어도

  그냥 생각만 하여도

  가슴 설레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작정 기대고픈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늘 버팀목이 되어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아픔과 고민을 의논하고픈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밤을 낮 삼아 통음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관심 없는 척해도 깊이 관심을 가져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혼자임에도 혼자 아님을 푸근히 느끼게 해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아도 언제나 자리를 지켜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 없어도 열 마디의 말보다 더 포근히 만져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나만을 아는 이에게 ‘함께함’의 바이러스를 옮겨 전염시켜 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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