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Nov 03. 2023

목우씨의 산골일기(149)

제149화 : 마을 한 바퀴 길에 듣는 소리

  * 마을 한 바퀴 길에 듣는 소리 *



  가을이 깊어지면 달내마을은 노랗게 변한다. 벼 베어내고 남은 짚단이 뿜어내는 빛깔도, 벼 그루터기도 그렇다. 뿐이랴, 참나무 같은 잡나무가 많아 단풍이 들면 온 산이 노란빛이다. 굳이 돈 들여 단풍 구경 갈 마음을 빼앗을 정도로.
  거기다 아침마다 걷는 걸음걸음에 하늘에서 축복이 내린다. 떡갈나무 잎이 무진장무진장 사부작사부작 떨어지니까. 그런데 귀가 그리 안 밝아도 아침에 차 한 대 지나가지 않고 사람 소리 들리지 않으니 떡갈나무잎 떨어지는 소리도 꽤나 뚜렷이 들린다.

  어찌 들으면 사각사각, 또 다르게 서걱서걱. 마치 칼로 무를 썰 때 나는 소리 같다. 그 소리와 발에 밟혀 바지직바지직 나는 소리도 좋다. 가만 생각해 보니 바람이 좀 불 때는 서걱서걱, 바람 없이 절로 떨어질 땐 사각사각. 마치 어미몸인 나무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몸부림 소리인 듯.
  나뭇잎은 여러 소리를 만들어낸다. 바람이 갈매빛 나뭇잎에 스치며 내는 소리, 나뭇가지에 큰 새가 앉았다 날아갈 때 가지가 휘청하며 내는 소리. 세 번째로 나뭇잎이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와, 떨어진 나뭇잎이 땅에 구르면서 내는 소리에다, 마지막 사람 발이나 차에 밟히면서 내는 소리.


(오늘 아침에 찍은 마을 뒷산 - 아침햇살과 단풍빛 잘 어울린다)



  오늘은 짐승의 소리도 들었다. 늘 하는 대로 아침에 지방도 쪽 방향으로 길을 잡는데 저 앞에 웬 녀석이 도로 한가운데 서 있다 놀라 달아난다. 고라니다. 길 가다 고라니 마주치는 일이야 산골에선 젊은 여인네 보는 확률보다 높고, 아기 울음 들을 확률보다 수십 배나 더 높다.
  저는 저대로 나는 나대로 가면 되지 하고 발을 놀리는데 모퉁이 돌아서자 또 녀석이 보인다. 왜일까? 대부분 야생동물은 사람 보자마자 숲으로 달아나는데 녀석은 오르막길 그대로 따라 올라가다가 내가 오지 않겠거니 했는데 판단착오로 늦게 도착한 나랑 마주쳤으리라.

  또 달아나기에 모른 체 발을 옮겼다. 저 앞 길모퉁이가 보인다. 직감에 녀석이 있을 것만 같았다. 예측이 들어맞았다. 나는 준비된 상태나 녀석은 게까지 자기 따라오리라고 예상 못한 모양. 이번엔 황급히 숲으로 뛰어드는데 내 입에선 절로 비명과 다름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어어... 안 되는데, 거긴 가시밭인데 안 되는..."
  내 외침의 뜻을 알아들었을 리 만무. 도리어 그 소리에 더욱 놀라 앞뒤 살피지 않고 사라졌다. 그때 귀에는 환청이겠지만 녀석의 비명이 들려왔다.


(마을 한 바퀴 행로)



  거긴 찔레나무, 망개나무 덩굴 잔뜩 우거진 숲이다. 아시다시피 찔레와 망개는 가시투성이 아닌가. 녀석이 달아나고난 뒤 망개덩굴 가까이 가보니 뭔가 묻은 게 보였다. 아마도 가시에 살갗이 긁혀 나온 피인 듯. 
  그때 귓속으로 고라니가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 : 아 띠발, 저 인간은 왜 아침마다 나와 댕기는 거야!
  목 : 야 임마, 나는 운동하러 이 시간에 나오는데 너는 왜 꼭 이때 나와 나를 놀라게 하는 거야!
  고 : 아 띠발, 니는 아침 안 묵고 사나 나는 밤새 쫄쫄 굶다가 하도 배고파 먹이 찾아나왔단 말이야!
  목 : 아 그래... 미안하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 아니다 밥 먹을 땐 고라니도 안 건드린다던데.

  고라니의 비명을 듣고 고라니랑 대화하고... 원래 글쟁이는 과장이 심하고 게다가 나도 뻥이 심하다고 아내가 얘기하니 어쩔 수 없다. 다행히 슬쩍 넘어가주는 글벗들이 계시니 더욱 뻥치게 되고. 계속되는 뻥이 싫으신 분은 이맘쯤에서 발길 돌리시기를.


(망개나무 덩굴 - 학명은 '청미래덩굴'인데 가시가 무척 날카로움)



   다시 우리 집 앞으로 돌아와 이번엔 윗마을로 방향을 잡는다. 마을 한 바퀴 길의 두 번째 행로다. 우리 마을에 감나무 해거리 한다고 얼마 전에 글 올렸는데, 여기만 제법 달려 있다. 
  늦가을, 바알갛게 익은 감 빛깔보다 더 유혹의 빛깔이 또 있을까. 정말 아름답다 못해 황홀하다. 홍시는 또 얼마나 달콤한가. 허나 홍시를 제때 안 따줘 바닥 위에 떨어지면 볼썽사납다. 차라리 가루가 되면 다행이나 아스팔트 위를 벌겋게 물들이니까.

  더욱 지나가는데 머리 위는 아니더라도 앞뒤 가까이 떨어질 때면 질색이다. 터지면서 쏟아진 파편은 물론 소리조차 반갑지 않다.
  "퍽!" '퍼억!"
  다음에 이어질 일이 생각나 듣기 참 징그럽다. 몸을 옴츠리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다. 감은 그래도 소리가 커 대비하지만 -사실 대비해도 소득없지만- 까치가 날아가다 똥 쌀 때는 오만 정이 다 떨어진다. 글로야 "찍!" 하고 표현 가능하지만 실제론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침묵의 곡소리라 이름 붙였다.




  언젠가 까치에게 어깨 똥 한 방 맞고 주고받은 대화다.

  목 : 야 이 새끼야!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아!
  까 : 왜 그러슈?
  목 : 너 이 새끼, 한 번만 더 이 짓 하면 동네방네 찾아다니면서 너거 집 다 뿌싸삘 기다.
  까 : 허어 참, 내 똥 내 맘대로 싸는데 누가 그때 지나가라 합디까?

  
  세 번째 행로는 팬션 몇 채가 죽 이어져 있는 길이다. 아내랑 둘이 갈 때는 이 길로 가지만 길이 굴곡 없어 땀이 안 나 혼자선 가지 않는다. 이 길로 가다가 다시 다른 개울로 옮겨 간다. 여기는 구(舊) 반장님 댁 앞이다. 반장님 댁은 마을에서 가장 개울에 접해 있다.
  언젠가 이 길 가다 어르신 만나 얘기 나누게 되었다. 그 날 따라 전날 비가 많이 와 물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들려왔다.

  목 : 이렇게 물소리가 시끄러운데 어떻게 주무세요?
  반 : 허허, 개울가 사는 사람들에게 물소리는 자장가라오.
  목 : 저렇게 소리가 큰데도요?
  반 : 오히려 가뭄 들어 물이 적게 흘러 소리 작으면 잠이 잘 오지 않는다오.


(우리 마을 개울 사진이 아님)



  반장님 댁 할머니는 작년에 하늘로 가시고 어르신도 몸이 편찮다. 이제 개울물 두고 얘기 주고받을 수 없을 정도로. 지금 물소리는 더 애잔하게 들린다. 슬쩍 반장님 댁으로 곁눈질하니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빨리 회복되어야 할 텐데.
  오늘 마을 한 바퀴 길에 들리는 소리를 글로 적지 않았을 뿐 더 많다. 꿩이 튀어나와 날아오르는 소리, 백여 마리 넘는 참새떼가 재잘재잘 한참 새살 나누다 내가 오는 바람에 우르르 뛰쳐나오는 소리.

  그래, 가을이라고 꼭 빛깔만 아름다우랴, 들릴 듯 들리지 않는 소리도 아름답지 않은가. 내일은 좀 더 다양한 소릴 들으려 귀의 평수를 넓혀야 하겠다.

작가의 이전글 목우씨의 긁적긁적(6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