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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Nov 12. 2023

목우씨의 산골일기(150)

제150화 : 집 이야기

  * 집 이야기 *



  한 달 전쯤(10/13) 「그림자가 없다」란 제목의 글을 배달할 때, 제가 그림 그리기를 두 가지 배우려 다닌다는 내용을 언급한 적 있습니다. ‘어반스케치’를 배우면서 느낀 점에 대해 얘기한 적 있는데, 오늘은 또 하나의 그림 공부 ‘그림책 자서전 만들기’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그림책 자서전 만들기’는 강좌 이름 그대로 살아오며 얻은 소중한 경험을 글 대신 그림으로 그리니 자서전 대신 '자서화'라 할까요. 만약 살면서 '반려견'에 얽힌 경험이 자신의 삶에서 소중하다면 반려견과 함께 살며 느낀 감정을 글 대신 그림 그린다고 보면 되겠지요.

  저는 뭘 할까 고민하다가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을 함께 기억할 내용을 떠올리다 살아온 집을 택했습니다. 살아온 집은 모두 여덟 채지만 다룰 집은 여섯 채.

  ① 연지동 팔칸집 (1956~64년)

  ② 산동네 무허가집 (65~68년)

  ③ 삼거리 만화방 (69~81년)

  ④ 울산 이천세대 아파트 (82~91년)

  ⑤ 울산 만세대 아파트 (92~93년)

  ⑥ 문무대왕면 용동리 주말주택 (94~2003년)


  이렇게 정해놓고 나니 쓸 거리가 생겼습니다. 


('팔칸집'인데 스케치만 한 상태)



  처음 부산진구 연지동 럭키회사 -LG그룹의 모태 - 바로 뒤 팔칸집. 이 집은 방 한 개와 부엌 하나로 된 집이 여덟 가구라 붙은 이름입니다. 한 가구 당 대략 일여덟 식구쯤 삐댔으니 얼마나 좁은지 아시겠지요. 게다가 변소는 달랑 하나.
  예순 명 남짓한 사람들이 변소 하나 이용했으니 아침이면 전쟁터. 그러니 집집마다 요강을 이용해야 했고. 아침부터 요강 여덟 개가 나란히 물 담은 채 한 줄로 늘어선 모습이 눈에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래도 이 집의 가장 큰 장점은 마당이 꽤 넓었으며, 또한 또래들이 많아 날마다 거기서 놀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이른 봄날 엄마들은 따뜻한 햇볕을 쬐며 한쪽에 모여 얘기를 나누고, 아이들은 새끼로 꼰 공을 차고 놀았는데...

  하필 그날 제가 찬 공이 요강 쪽으로 날아가 요강 하나가 박살이 났고... 잠시 적막 후 제 뺨에 불이 났습니다.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또 날아온 따귀에 땅바닥에 쓰러졌고... 누운 채 보니 주인아줌마의 화난 얼굴이 보였고... 울엄마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용서해 달라는 눈빛만 보낼 뿐.


(요강 깬 죄로 주인아줌마에게 뺨을 세게 맞음)



  문제는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일 나갔다가 돌아온 아버지가 누나에게 얘기 듣고는 주인집을 쳐들어가 제가 맞는 양의 몇 배를 아줌마 아저씨에게 갚아주었으니. 그리고 우리는 다음날 바로 그 팔칸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당시엔 집주인 위세가 하도 당당할 때인 데다 순경까지 대동한 상황이었으니.
  커서 안 일이지만 그 당시에 요강이 깨지면 그 집안에 재수 없는 일이 생긴다는 미신이 떠돌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주인아줌마로선 제가 집안에 망쪼(亡兆) 들 짓을 했으니 때렸을 테지만, 아버지에겐 자식 다섯 잃고 얻은 귀중한 아들이었으니...


  팔칸집에서 쫓겨난 날 아버지는 바로 집 짓기에 착수하였습니다. 동네 산중턱에 올라가 기둥 넷을 세우고 거적 덮은 채 임시거처를 마련한 뒤, 바로 다음날부터 흙으로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흙집이라 건강에 좋다고 찬사 받을 일일지 모르지만.

  처음엔 정말 흙집이었습니다. 마치 요즘 시골 가면 가끔 보이는 흙담처럼 벽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흙집은 아시다시피 비 오면 끝장. 그때 비가 오기만 하면 우리 가족은 모두 보초를 서야 했습니다. 벽이 무너지면 안 되니까요.


(가운데 가로줄에 빨간  페인트가 길게 그어짐)



  그렇게 어설픈 흙(벽)집은 시간이 지나면서 블록으로 벽을 쌓으면서 제법 튼튼한 집이 되었고, 지붕도 처음 도단(양철)으로 덮은 도단집이었는데, 나중에는 슬레이트 얹어 무너질 위험도 없어졌습니다.

  헌데 튼튼한 집이 되었건만 이번엔 구청에서 찾아왔고. 그리고 우리 집 담벼락에 붉은 페인트 줄이 굵게 그어졌습니다. 알고 보니 누가 무허가 건물이라 신고해서 그렇게 됐다 하더군요. 다른 집들은 무허가라도 신고한 사람 없어 넘어갔지만. (누군지는 짐작하지만)

 

  무허가 집에서 제법 살다 형편이 좀 풀려 아랫마을 삼거리로 옮겼습니다. 바로 앞집엔 ‘박씨 점방’이 있었고. 거기서 아버지는 '까불이 만화방'을 여셨습니다. 그즈음엔 누나 둘이 회사 다녀 생활엔 지장 없었으나 당신은 용돈이나 벌자는 뜻에서 펼친 모양인데...

  아 만화방, 거기서 만화를 참 많이 읽었습니다. 평소엔 만화를 절대 보지 못하게 했건만 당신께서 어디 볼일 보려 가시면 제가 맡았으니까요. 「삐빠」, 「의사 까불이」 말고도 당시 「도람통 삼총사」와 「마음의 여정」도 인기만화였다고 하는데 솔직히 '삐빠'와 '의사 까불이'만 기억날 뿐.


(아랫마을 삼거리 만화방집)


  만화만 진열하던 아버지가 어디서 들었는지 무협지를 갖다 놓으려 했습니다. 그때 제게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너 학교에서 한자 배우지?” “네.”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다음날 무협지가 들어왔고 저는 한자 제목에 한글로 '토' 다는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허나 고작 중학교 2학년 주제에 무협지에 나오는 제목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행히 동네 형들이 도움 줘서 해결했고. 그리고 무협지도 정말 신나게 읽었습니다. 「정협지」 「군협지」 「비룡」 「비호」 「천살성」 ... 덕분에 '와룡생'과 '김광주'는 최고의 작가로 남았고.



  직장을 부산에서 울산으로 옮기고 결혼을 하자 재단에서 사택을 주었습니다. 2000세대 산다 하여 이름 붙은 이천세대 아파트. 5층뿐인 데다 연탄을 때야 했지만, 아이들에겐 정말 좋은 곳이었습니다. 흙바닥에서 공기 받기, 돌치기 하며 놀 수 있었으니까요.

  헌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울엄마의 중풍과 치매. 당시에도 요양시설과 요양병원이 있었습니다만 월급의 1/3 정도 들어 포기하고 '만세대 아파트'로 옮겨 집에 모셨습니다. 울엄마는 하루 종일 베란다에 한 팔 기대어 서서 동울산시장을 오가는 사람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지냈고...


  그때 제 농촌 취향과 울엄마 위해 마련한 문무대왕면 용동리 시골집. 남들에겐 별장이라 했지만 천만 원 주고 사서 천만 원 들여 고친 촌집. 그래도 울엄마는 이곳에 오는 날이면 설핏 미소를 띄웠습니다. 그 모습이 좋아 토요일 오후가 되면 그곳으로 달려갔고.


(만세대 아파트 베란다, 울엄마)



  어머니 돌아가신 다음 해 2005년 드디어 도시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양남면으로 옮겨 ‘내돈내산’으로 마련한 전원주택. 산ㆍ들ㆍ물ㆍ꽃ㆍ나무도 너무너무 아름답지만 울엄마는 없습니다. 산도 메아리 보내고 물도 화답하지만 울엄마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습니다.


  이제 남은 꿈은 아홉 번째 집입니다. 새로 집을 지을 거냐구요? 아닙니다. 현재의 우리 집에 갖추지 못한 풍광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바다. 저 멀리 보이는 산만 무너뜨리면 바다가 나오니 오늘부터 산의 흙을 조금씩 파서 옮기렵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고사에 따르면 한 노인네가 집 앞을 가로막는 산 때문에 빙 둘러감을 불편히 여기다가 산을 옮기기로 했지요. 저는 우공과 달리 바다를 가로막고 있는 산을 옮기려 마음먹었습니다. 날마다 마음의 삽으로 흙을 퍼 나르면 언젠가는 뻥 뚫려 바다가 보이겠죠.
  목공이산(木公移山 : 목우가 산을 옮기다)의 전설은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문무대왕면 용동리 촌집)


  *. 사진은 그림책 자서전에 필요한 9장 가운데 7장입니다. (커버 사진 '이천세대 아파트' 포함) 아직 빛깔도 넣지 않고 세세한 부분 묘사도 부족한지라 다음에 완성하면 그 그림으로 대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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