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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Nov 17. 2023

목우씨의 산골일기(151)

제151화 : 소리를 잡으러 가볼까?


       * 소리를 잡으러 가볼까? *


  어제 아침 마을을 한 바퀴 돌다 계곡 끝날 즈음 벼 벤 논을 지나는데 갑자기 ‘후드득’ 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세상에! 멧비둘기 백여 마리가 벼 이삭을 먹느라고 한창 대가리 박고 먹고 있던 참에 내가 왔으니 저들도 놀라 날아오른 모양이다.
  “야 이 ×끼들아!”
  나만 놀란 게 아니라 멧비둘기들도 놀랐겠지만 절로 터져 나오는 욕을 참을 수 없었다. (가끔 제가 욕 내뱉는 표현을 보고 ‘어 선생님도 욕하시네.’ 하는 분들 계시던데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욕을 되게 잘합니다.)

  돌아와서 글 쓸 거리를 잡았다 여겨 쓰려는데 멧비둘기 무리가 갑자기 날아오를 때 내는 소리를 표현하려다 잠시 망설였다. ‘후드득’ ‘후다닥’ ‘호로록’ ‘파라락’ ‘푸드덕’ 아는 의성얼 다 떠올렸으나 도무지 마땅하게 적을 표현이 없었다.
  참 이상하다. 내가 분명 들었건만 적을 수 없다니. 오랜 시간 지난 것도 아니고 고작 20분밖에 안 지났건만 확실히 들은 소리를 적을 수 없다니. 그러자 문득 그저께 수요일 배달한 손세실리아 시인의 「홀딱새」란 시가 떠올랐다.
  거기서도 ‘검은등뻐꾸기’의 소리를 두고 지역마다 나라마다 제 각기 내는 소리가 달랐지 않은가. 우리나라 지역에 따라 ‘홀딱새’라고 하는데 솔직히 내 귀엔 ‘홀딱벗꼬’ ‘홀딱벗꼬’로 들리지 않았다.


(멧비둘기 떼 - 구글 이미지에서)



  대학 다닐 때 일이다. 언어학 시간에 페르디앙 드 소쉬르의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을 도무지 구분할 수 없었다. ‘시니피앙’은 프랑스어로 ‘의미하는 것’을 나타내며, ‘시니피에’는 ‘의미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는데 그 뜻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으니..
  그러다 ‘언어의 자의성’으로 옮겨오면서 조금 이해가 되었다.  언어의 자의성은 언어를 구성하는 '형태'와 '내용'이 본질적으로는 관련 없으며 자의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이론을 가리킨다.

  이렇게 적으면 전공 안 한 사람은 알 수 없으니 간단히 풀이하자. 세계인이 같은 자리에서 닭 울음소리를 들으면 똑같은 소리로 들려야 마땅한데 나라마다 그 소리를 다르게 적는다. 즉 모든 소리는 그 나라에 맞게 임의로 만든다. 그게 자의성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선 '꼬끼오' 하면 다른 나라에서도 꼬끼오로 적어야 하는데 다 다르다. 영어권에서는 ‘코크 아 두들 두(cock-a-doodle-doo)’, 중국에선 수탉은 ‘워워(喔喔)’ 암탉은 ‘거거(咯咯)’, 일본에서는 ‘꼬께꼬꼬(일본어 표기 생략)’, 프랑스에선 ‘코코리꼬(cocorico)’, 독일에선 ‘키케리키(kikeriki)’, 스페인에서는 ‘키키리키(quiquiriquí)’라 적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같은 닭을 두고 나라가 다르다고 들리는 소리조차 달라질 수 있는가. 그래서 한 언어학자가 실험을 했던 모양이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임의로 닭 한 마리 갖고 와 우는 소릴 적어라 했더니 다들 자기 나라에서 쓰는 소리로 적었다나.
  이는 언어학을 조금만 알면 당연한 일이라 여긴다. 동물이나 사물 또는 자연이 내는 소리를 ‘음향’이라 하고 사람이 내는 소리를 ‘음성’이라 한다. 음성은 문자로 표시할 수 있다.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 하는 말이라도 또박또박 말하면 받아 적을 수 있다. 허나 동물이 내는 소리는 불가능하다.

  나는 이를 ‘청각의 관습화’라 칭한다. 습관이 한 개인의 것이라면 관습은 한 집단(나라 포함)의 것이니까 그 나라 사람 모두가 다 그렇게 듣지 않은가. ‘청각의 고정관념’이라 할 수도 있다. 한 번 학습돼 귀에 들어와 머릿속에 박힌 그 소리는 같은 집단에서 같은 소리로 받아들이니까.



(나라마다 동물 소리가 다름)



  요즘도 아침마다 마을 한 바퀴 돌다 보면 고라니를 만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직 해뜨기 전엔 고라니의 세상이니까. 또 밤에는 고라니가 우는 소리도 듣는다. 짝짓기 하려고 짝을 찾는 소리도 있을 테고 배고파 우는 새끼들의 소리도 있을 테지만 도무지 글로 표현할 재주가 없다.
  예전에 마을 어르신들께 어떻게 들리느냐고 물은 적 있다. 어르신마다 다르게 말했다. ‘아!’ ‘야!’ ‘어!’ ‘어억!’ ‘까아!’ 책에도 일정하게 나오지 않는다. 글쓴이가 마음대로 적었다. 그러니까 고라니의 울음을 나타내는 소리는 정형화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개구리는 ‘개굴 개굴’, 뻐꾸기는 ‘뻐꾹 뻐꾹’, 꾀꼬리는 ‘꾀꼴 꾀꼴’ 까마귀는 ‘까악 까악’ 이렇게 정형화된 소리가 없다는 뜻이다.

(대밭에 서면 어떤 소리가 들려올까)



  우리말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의성어와 의태어가 발달해 있다는 말을 들었을 게다. 정말 그렇다. 모습 나타내는 말(의태어)과 사물의 소리를 표현하는 말(의성어)이 우리말에 참 많다고 하니. 소설가 최명희의 [혼불]을 한 번 보자. 의성어의 매력을 흠뻑 느낄 표현이 많다.

  “청명하고 볕발이 고른 날에도 대숲에서는 늘 그렇게 소소한 바람이 술렁이었다. 그것은 사르락 사르락 댓잎을 갈며 들릴 듯 말 듯 사운거리다가도, 솨아 한쪽으로 몰리면서 물소리를 내기도 하고, 잔잔해졌는가 하면 푸른 잎의 날을 세워 우우우 누구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아직 많이 부족하다. 어제 아침 들은 멧비둘기 날아오르면서 내는 소리도 표현 못하고, 고라니 울음소리도, 멧돼지 소리 (집돼지 소리와는 다름), 박새 소리, 곤줄박이 울음소리도 표현 못하니.
  그러면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고라니가 슬프게 울고 있다’, ‘성난 멧돼지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오늘따라 박새 울음소리가 이상하게 들린다’ 마치 ‘이름 모를 꽃이 들판에 가득 피어 있다’ ‘숲에 드니 이름 모를 나무가 무성하다’와 같지 않은가.

  오늘 글은 새들이 떼 지어 앉았다 날아갈 때 나는 소리를 모두 한꺼번에 묶어 '푸드덕' 하고 적기보단 또 다른 소리로 적을 수 있을까 함을 잠시 모색해 보았다. 우리는 소리 표현에 너무 인색하여 모두 같은 글로 적으니까.
  소리를 적으려면 관찰력을 키워야 한다. 그냥 듣고 보내지 말고 그 소리를 잡아야 한다. 앞으로 그 일을 한 번 해볼 참이다.

  *. 아래 영상은 고라니 울음소리입니다. 어떻게 표기해야 할지 생각해 보세요.

https://youtube.com/shorts/TalWXSACuiU?si=EDkWVDHNegq1P7c7


고라니 울음소리 들어보셨어요?꺄우#고라니#고라니울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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