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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Jan 03.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34)

제34편 : 고정희 시인의 '겨울 사랑'

@. 오늘은 고정희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겨울 사랑
                           고정희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 고정희 시인(1948~1991년) : 전남 해남 출신으로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이며, '여성해방공동체'를 구상하는 등 대표적인 여성운동가.
 

 <함께 나누기>

  현재 시 쓰고 있는 여류시인 가운데 제 기억 속에 담겨 있는 분들을 죽 나열해 봅니다. 천양희, 나희덕, 황인숙, 최영미, 정끝별, 최승자, 문정희, 김승희, 신현림, 박규리...
  만약 돌아가신 시인까지 넣는다면 (기억의 서랍) 맨 앞자리에 둘 분이 바로 고정희 시인입니다. 시인이 펴낸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라는 시집 서문에 적혀 있는 글을 인용해 봅니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한 시대의 싸움꾼뿐만 아니라, 구도자의 역할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처럼 사는 거다"
  시처럼 살았던 시인, 그래서 그녀를 좋아하던 시벗들은 43세의 나이로 1991년 지리산 취재 여행 등반 도중 실족사고로 작고했을 때 매우 슬퍼했지요.

  시로 들어갑니다.

  제 아는 퇴직 여교사 가운데 결혼 후 삼 년만에 남편이 하늘로 가신 뒤 재혼하지 않고 아직까지 홀로 사시는 분이 계십니다. 아이 없는 데다 누가 봐도 외모도, 직업도, 성격도 다 갖춰 곧 다시 짝을 찾으리라 여겼는데 '홀로삶'을 계속 지향하더군요.
  친정 부모, 형제자매와 친구, 동료가 숱하게 소개팅 주선했건만 홀로삶을 고집했고, 지금도 혼자 살아갑니다. 오래전에 하도 궁금해 물었지요. 왜 재혼하지 않느냐고. 답이 이랬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삼 년 동안 사랑의 기름을 다 써버려 다시 태울 연료가 없어서'라고.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딱 한 사람만 사랑하다 헤어져도 그 한 사람과 뜨거운 사랑으로 온몸을 불태웠다면 앞에 제가 예로 든 분처럼 삶을 버텨나갈 동력 얻을지 모릅니다. 헌데 '묵묵한 이별이 겨울을 버티게 한 힘'이었다 함은?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니까 어떤 힘든 상황이 와도 견뎌낼 수 있다는 뜻으로 새겨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둘 사이를 막고 있던 벽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면 황홀한 시간을 갖게 될 터. 여기서 잠깐 제목 '겨울 사랑'이라고 했는데, 가만 보면 시 속에는 겨울을 암시하는 어떤 표현('겨울'이란 시어 말고)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럼 겨울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바로 그녀가 걸어온 혹독한 삶의 여정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요. 이렇게 보면 이 시가 연인과의 사랑으로 그치지 않고, 60~70년 대 시인이 부닥뜨렸던 엄혹한 현실을 버티게 한 힘으로 봐도 됩니다.
  즉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와,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과,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이 화자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고. '치자꽃 향기, 포옹, 별'이 주는 각각 이미지 규명보다 화자를 일으켜 세운 힘의 근원이라는 뜻으로 풀어봅니다.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구도자는 단 한 순간의 깨달음을 위해, 진실한 사랑 찾아다니는 사람은 그런 사랑을 찾기 위해, 떠돌다 얻게 되었을 땐 모든 걸 다 얻은 기쁨을 누리겠지요. 어쩌면 우리는 단 한 사람(깨달음)을 만나기 위해, 내가 누군가의 단 한 사람이 되어주기 위해 평생을 온힘을 다해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시는 함축적 의미 이해에 좋은 본이 되는 작품입니다. 단순히 '첫사랑의 애틋한 얘기'로 봐도 되고, 엄혹한 시절 치열하게 살 때 자신을 버티게 해 준 힘의 근원을 찾는 시로 봐도 되고, 겨울이란 계절에 자신을 돌아보며 바른 삶의 길을 찾아가는 시로도. 이런 게 시 읽는 맛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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