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Feb 06.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60)

제60편 : 이상국 시인의 '커피 기도'

@. 오늘은 이상국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커피 기도
                              이상국

  커피점에 온 모녀가
  커피가 나오자 기도를 한다
  나는 보던 책을 내려놓았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기도는 길어지고
  딸이 살그머니 눈을 떠 엄마를 살피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하느님도 따뜻한 커피를 좋아하실 텐데……
  - [달은 아직 그 달이다](2016년)

  #. 이상국 시인(1946년생) : 강원도 양양 출신으로 197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오랫동안 설악산 아래 살며 불교잡지 [유심]지 주간과 [설악신문] 대표를 역임했으며, 한국작가회의 회장(2020. 2~ 2022.1)을 맡음.


(영화 '커피메이트' 스틸 컷)



  <함께 나누기>

  미리 말하지만 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아닙니다. 다만 밥 먹을 때나 음식 먹을 때는 십자 성호 긋습니다. 영세받은 지 삼십 년이 지나다 보니 성호 긋는 게 습관이 돼 나타난 현상일 뿐 신심(信心)과는 거리가 멉니다.
  어느 날 직장 다닐 때 동료들과 술 마시는 자리에서 종업원이 상을 내려놓자 저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나 봅니다. 그러자 한 선생님이 “아 선생님, 술 마실 때도 성호 긋습니까?” 순간 아차 했습니다. 굳이 긋지 않아도 되련만.

  그걸 보고 어떤 선생님은 저더러 독실한 신자라 했고 다른 한 분은 이리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술 마시기 전 성호를 그으니까 갑자기 오늘은 술을 좀 거룩하게 마셔야겠습니다.”
  그 말에 일행 모두가 빵 터졌습니다. 단지 무심코 그은 성호 덕(?)에 그날 거룩한 음주를 하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거룩한 웃음은 터졌습니다.

  오늘 시의 내용은 쉽습니다. 읽으면 단박에 들어올 정도로. 시인이 쓴 시작 노트 일부를 옮겨보겠습니다.
  “언젠가 나는 딸이 일하는 회사 지하 커피점에서 딸을 기다리다 우연히 한 장면을 만났다. 커피를 앞에 두고 기도하는 모녀의 모습이 너무 경건해서 나도 책을 내려놓고 덩달아 기도에 동참하였다.”

  시작 노트 그대로입니다. 평소 신심이 깊은 한 어머니가 딸과 함께 커피점에서 커피를 시키고 기다리던 중에 커피가 나오자 기도를 합니다.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 여기며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가 생각보다 길어졌나 봅니다.
  하마 끝나겠지 하며 기다리던 딸이 살그머니 눈을 떠 엄마를 살피고는 다시 눈을 감습니다. 그 모습 지켜보던 화자는 기도보다 식어가는 커피에 더 신경이 쓰입니다. 그대로 두면 식어버릴 테니까요.

  지금 필요한 건 기도보다 식기 전에 마시기입니다. 식어버린 커피는 제 맛을 잃어버리니까요. 갑자기 궁금합니다. 그 엄마는 무슨 내용의 기도를 그리 오래도록 했을까요? 단지 감사 기도라면 짧을 텐데 말입니다.
  이렇게 딸과 함께 커피 마시는 기쁨 누리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면 그리 길지 않으련만... 혹 커피 마시도록 해준 이들을 위한 기도이거나, 현재 커피 마시고 있는 모든 이들의 행복을 비는 기도일까요?

  그도 아니면 글로벌 커피 회사가 운영하는 커피 농장에서 일하는 어린이들의 노동력 착취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거나, 열대지방에서 야생 사향고양이 '루왁'을 잡아 철망에 가둬 놓고 굶긴 뒤 억지로 커피콩을 먹게 해 배설하는 똥으로 만든 ‘루왁 커피’의 아픔을 생각함인지...
  궁금하진 않겠지만 저는 점심 먹고 난 뒤 커피를 한 잔 마십니다. 커피가 몸에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습관으로 마실 뿐 의미는 두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만은 커피 마실 때 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생계 때문에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어린이를,  또 억지로 커피콩을 먹어 나오는 배설물을 토하는 루왁을 생각하며 잠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렵니다.


- 열 살 전후의 아이들이 일하는 케냐 커피 농장 [한국일보](2019년 8월 28일) -


작가의 이전글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59)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