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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Feb 07.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61)

제61편 : 최영미 시인의 '운수 좋은 날'

@. 오늘은 최영미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운수 좋은 날
                                    최영미

  단골식당에 12시 전에 도착해
  번호표 없이 점심을 먹고
  서비스로 나온 생선전에 가시가 하나도 없고
  파란불이 깜박이는 동안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너
  "환승입니다" 소리를 들으며
  (교통비 절약했다!)
  버스에 올라타
  내가 내릴 곳을 지나치지 않고
  내가 누르지 않아도 누군가 벨을 눌러
  뒤뚱거리지 않고 착지에 성공해
  신호에 한 번도 걸리지 않고
  익숙한 콘크리트 속으로 들어가
  배터리가 떨어졌다는 경고음 없이
  현관문이 스르르 열리는 날
  - [공항철도](2021년)

  #. 최영미 시인(1961년생) : 서울 출신으로 1992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 33세에 펴낸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으로 독자의 시선을 끌었으나 문학 외적인 풍문에 휩싸여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평을 들음

  현재 모 신문에 ‘최영미의 어떤 시’를 연재하고 있음.



  <함께 나누기>


  1994년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집을 내면서 정말 화려하게 등장한 당시 33세의 최영미 시인. 1980년대 사랑과 아픔과 상처와 위선을 잘 묘파한 시집으로 평가받으면서 일약 문단의 총애를 받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베스트셀러 시집을 냈어도 그 한 권으로선 생계유지가 만만치 않은 시인의 현실. 그 때문인가요, 시는 변모합니다. 십여 년이 흐르면서 ‘비틀기(풍자)’를 내세워 현실을 비판하는 시를 발표합니다. 그러면서 적도 생기고.

  2021년에 펴낸 [공항철도]란 시집에 나온 자기 이름을 딴 시 「최영미」란 작품에서 자신을 ‘적을 만드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합니다.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당대 최고 문단권력자인 고은 시인을 글감으로 한 「괴물」이란 시를 발표해 소위 미투(Me Too) 운동에 불을 지폈지요.


  오늘 시는 풀이 없이도 술술 읽히는 작품입니다. 비트는 내용이 전혀 없는 그래서 '어 최영미도 이런 시를 쓰냐!' 하는 말이 나올 만큼.


  늘상 번호표 받고 기다려야 하는 단골식당에 오늘따라 손님이 적어 번호표 없이 바로 점심을 먹습니다. 게다가 서비스로 나온 생선전에 가시도 하나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운수가 좋을까요.

  행운은 계속 이어지려는지 마침 길 건너려 하는데 파란불이 깜박이는 동안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너갈 수 있습니다. "환승입니다!" 소리 들으며 버스에 올라탔는데 내가 내릴 정류소에 누군가 먼저 벨을 눌러 손대지 않고 그냥 내립니다.


  이렇게 행운은 계속 이어집니다. 가는 도중에 빨간불 신호에 걸려 지체하는 시간 없이 바로 익숙한 콘크리트 속(아파트)에 들어갑니다. 마지막에도 행운은 화자 편입니다. 평소 현관문 도어록 번호를 누를 때마다 배터리 교체를 알려주는 경고음이 났는데 오늘은 그냥 스르르 열립니다.

  분명 거듭되는 행운의 연속입니다. 여유롭게 사는 이가 보면 행운이라 할 만한 것도 아니건만... 그래서 참 안쓰러운 행운의 연속입니다. 우리 소시민은 이런 행운도 잘 얻지 못하며 살다 보니 이런 행운에게도 감사해야 한다는 뜻으로 봐도 됩니다.


  허나 그보다는 작은 행운이 주는 큰 기쁨으로 풀이하는 게 더 좋겠지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뜻의 ‘소확행’처럼. 늘 크고 높고 넓은 것만 추구하며 살다가 이젠 조금 알 듯합니다. 이런 사소한 행운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그런데 한 가지 이런 날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서민에게 주어지는 행운은 누가 가로채기 쉬우니까요. 소설가 현진건 님의 [운수 좋은 날] 끝 구절처럼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하는 넋두리를 늘어놓은 일 없게.


  한 편 더 배달합니다.


       - 최후 진술 -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진실을 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네잎클로바는 '행운'이고, 세잎클로버는 '행복'이라죠. 행운보다는 행복이 더 나은데도 행운을 찾아다니는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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