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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Feb 20.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67)

제67편 : 정현종 시인의 '좋은 풍경'

@. 오늘은 정현종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좋은 풍경
                                   정현종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 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서 그 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 놓고 서 있었습니다.
  - [정현종 시선집-섬](2015년)

  #. 정현종 시인(1939년생) : 서울 출신으로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서울예전 교수를 거쳐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봉직하다가 정년퇴직했으며, 앞서 배달한(1월 10일) 천양희 시인과는 부부였다가 헤어짐.




  <함께 나누기>

  2년 전 딱 이맘때 쓴 「산골 한 구석에서 무슨 일이」란 글 내용 일부를 옮겨봅니다.
  “겨울에 대나무를 쪄놓으면 마른 상태라 봄여름에 요긴하게 쓸 수 있어 대나무 몇 그루 자르러 백토광산 길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은 봄과 가을엔 외지인들 차가 대는 일이 잦았습니다. 나물이나 약초를 캐러 온 사람들이 주차하기 유일한 곳이니까요.
  하지만 겨울에는, 특히 요즘처럼 한파가 계속되는 날에는 올 리 없지만 차 한 대가 주차해 있어, 그래도 칡을 캐러 온 사람이라 여기며 갔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이르자 갑자기 차 앞유리의 윈드 브러시가 움직이면서 비눗물이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닙니까.

  그건 분명히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제 관심을 끌 리 없어 무심코 지나쳤을 텐데... 그러니 궁금해 그쪽을 바라보자 브러시가 잠시 멈춘 사이로 뭔가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아 자세히 보려 하니 브러시가 돌아가며 비눗물이 다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것 봐라!’ 하는 생각에 일부러 천천히 걸었습니다. 하등 관심 없이 지나갈 사람에게 관심을 부여한 이상 그냥 모른 체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가까이 갈수록 브러시액이 쏟아져 나오고, 저는 더욱 천천히 걸었고... 자세히 볼 수는 없었으나 분명히 운전석과 조수석에 흐릿하게나마 사람이 보였습니다.

  그러자 조수석 사람은 남자 코트로 보이는 옷으로 온몸을 덮어 얼굴을 볼 수 없었는데 그냥 짐작으로 눈치챘습니다. 아마 둘은 신나는(?) 시간을 가지다 불청객이 나타났는데, 몰두 중이라면 쉬 알아차릴 수 없는 상황임에도 긴장감 땜에 위험신호 감지했으리라 여깁니다."

  오늘 시도 읽으면 금방 짐작할 내용입니다. 평소 정현종 시인은 점잖은,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시를 많이 썼는데 처음 보는 류(類)의 시라 붙잡았습니다. 어찌 보면 좀 외설적으로 보이는데 가만 읽으면 학자다운 브레이크를 역시 군데군데 걸어놓았습니다.

  이 시에서 두 시어가 핵심이 됩니다. ‘그 짓’과 ‘얼떨결에’. 이 두 시어가 많은 상상을 자아내게 만드니까요. 우선 ‘그 짓’을 봅니다. 만약 이런 시어 대신 ‘키스’니 하는 식의 명징한 표현을 했더라면 시의 맛이 훨씬 줄어들었을 겁니다.
  ‘그 짓’은 ‘외설적’이라는 표현보다 직접 말하기 아닌 '돌려 말하기'의 효과를 살린 표현입니다. 즉, 예년보다 빨리 온 봄에 밤나무가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 놓은 왕성한 생명력을 잘 보여줍니다.

  물론 독자의 상상을 극대화하기 위해 ‘남녀 한 쌍’, ‘숲 속’, ‘입김’, ‘그 짓’, ‘밤꽃’ 같은 객관적 상관물을 적극 활용합니다. 다만 누가 봐도 그 짓은 '그 짓'이 뻔함에도 ‘얼떨결에 꽃을 피우다’는 식의 표현으로 성(性)보다 성(聖)에 더 가까움을.
  또 '남녀 한 쌍이 올라가더니' 대신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로 바꿈으로써 외설성이 순화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둘은 중년 남녀의 불륜 관계보다는 젊은 연인 사이에 이는 활화산 같은 사랑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담은 듯이 보이게 하는.

  마지막 부분 "예년보다 빨리 온 올봄 그 밤나무는 /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 한나절에 다 피워 놓고 서 있었습니다."이 시의 정점을 이루며 아름답게 마무리했습니다. 그래선가요, 시인은 자기의 많은 시 가운데 추려 시선집을 펴냈는데, 거기에 오늘 시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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