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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Feb 21.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68)

제68편 : 나희덕 시인의 '푸른 밤'

@. 오늘은 나희덕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푸른 밤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 [그곳이 멀지 않다](2004년)

  *. 에움길 : 굽은 길,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

  #. 나희덕 시인(1966년생) : 충남 논산 출신으로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건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정직한 시를 쓴다는 평을 들으며,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창과 교수로 재직




  <함께 나누기>


  앞에서 문정희 시인을 시를 잘 쓰는 시인이라고 평했다면, 나희덕 시인을 두고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참 좋은 시를 많이 쓰는 시인'. 89년에 이 시인의 시집을 읽고 반한 뒤로 시팬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해마다 배달하는 시인이기도 하지요.
  다만 문정희, 최영미, 신현림, 김혜순 시인처럼 대중의 시선에서 좀 떨어져 있어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으나 좋은 시인임은 분명합니다. 저만 그리 느낀 게 아닌 듯, 시인의 시가 교과서 꽤 많이 실렸습니다. 그게 평가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객관적으로 인정받는다는 얘기겠죠.

  시로 들어갑니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이 시구를 아마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하도 고와 여기저기 인용되다 보니 시인 이름은 몰라도 '어, 이 시의 한 구절이네!' 하시겠지요. 사랑에 빠지면 우리 마음이 어떻게 되는지 잘 보여줍니다. ‘너’를 사랑하지 않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학교 다닐 때 시험에 자주 언급된 '역설법'에 따른 표현인데,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했으면 절대로 가지 않았어야 하는데, 실은 너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했으니까요. 어쩌면 네게로 가는 길을 걸으며 화자는 숱한 번민에 휩싸였을 겁니다. 그 길이 고통의 길이라는 걸 화자 또한 뻔히 알고 있기 때문에.

  “네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다”
  모든 순간 오직 ‘너’만을 생각합니다. 내가 별을 바라보면 별빛은 너의 머리 위에 반짝이고, 나의 한숨과 입김을 받은 꽃들은 네게로 향합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 대신 나의 눈빛 나의 한숨 나의 입김 나의 영혼조차 너에게로만 흘러갑니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사랑했지만 너의 거부로 인한 치욕, 상처받은 자존심의 치욕을 물리치며 네게로 치달린 끝없는 나의 사랑, 하루에도 몇 번씩 너를 향해 사랑의 마음 담아 두레박을 드리우지만 텅 빈 상태로 돌아옴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또 두레박 내립니다.

  “나의 생애는 / 지름길을 돌아서 /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세상에 수많은 길이 있고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그 길의 끝에는 네가 있다고 믿습니다.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절대적이며, 운명이며, 필연이어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결국 너에게로 갈 것이라고.
  지름길이 빨리 가는 직선의 길임에 비해, 에움길은 굽어 있는 곡선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에움길로 네게로 가는 길은 그만큼 멀고 고통스러운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향해 지름길 대신 에움길을 택합니다.
  저는 이런 사랑 하고 싶지 않고 받고 싶지도 않습니다. 마치 김광석이 부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에.

  끝내면서 두 가지 질문이 나오리라 예상돼 미리 선수 칩니다. 시 속의 '너'를 꼭 연인으로 한정할 필요가 있는가와 '푸른 밤'의 뜻. 첫째의 답은 당연히 '한정할 필요가 없다'입니다. 한용운 선사의 시에 나오는 '님'을 조국, 부처님, 절대자, 연인 등으로 다양하게 보듯이.
  푸른 밤은 푸른 하늘과 대립하는 '어두운 밤'이라야 자연스러운데, 밤도 푸르냐 하는 의문에서 나올 예상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푸른 밤의 쓰임은 제법 오래입니다. 영화 장미희 안성기 주연의 [깊고 푸른 밤]에서 mbc 라디오 심야프로 [푸른 밤]과 [제주도의 푸른 밤]이란 노래에서 두루 쓰였으니까요.
  어둠이 세상에 내려왔지만 하얗게 빛나는 달과 별로 하여 다시 푸름이 연장되고 있다는 마음의 푸른빛으로 새겨봅니다.

  제 해설은 길잡이입니다. 길을 바로잡아 이끄는 목적보다, 여러 갈림길을 알려주는 역할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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