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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r 05.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75)

제75화 : 이원규 시인의 '단 하나의 천수천안'

@. 오늘은 이원규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단 하나의 천수천안
                                     이원규

  저 산은 그 어떤 꽃들도 마다하지 않는다
  독초도 고슴도치도
  멧돼지도 말벌도 살모사도
  저 강물은 절대로 분별하지 않는다
  천 개의 손, 천 개의 눈을 가졌기 때문

  깊은 계곡 물소리 들으며
  *얼레지가 쫑긋 연분홍 귀를 내밀고 있다
  그 순간 저 가녀린 꽃처녀는
  마치 치마를 뒤집어쓰듯 온몸 통째로 귀가 된다
  봄비가 오시면 온몸이 입이자 혀가 되고
  깊푸른 물속의 하늘을 볼 때는 눈동자
  누군가 살며시 입산하면 꽃송이 통째로 코를 벌름거린다

  나 또한 그런 적이 있었다
  밤길을 도와 우물가 앵두나무로 다가오면
  그녀의 발자국 소리에 온몸 통째의 귀가 되고
  밤바람 불면 단 하나의 솜털로 파르르
  첫 키스 때는 겨우 혀만 살아 있었다
  시시로 그녀네 울타리의 나팔꽃처럼 킁킁 기웃거리는 코가 되고
  잠시라도 안 보이는 날이면
  당산나무 밤 그늘을 떠도는 반딧불이 눈동자

  온몸 단 하나의 손
  온몸 단 하나의 귀일 때
  비로소 천 개의 코가 되고 눈이 되고 혀가 된다는 것을
  아예 몰랐다는 듯이 까맣게 잊고 살았다
  -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2019년)

  *. 천수천안(千手千眼) : 관세음보살의 딴 이름으로 손이 천 개 눈도 천 개여서, 중생의 아픔 잘 알아 어루만져 준다는 뜻을 지님.
  *. 얼레지 : 봄에 자주빛(연분홍) 꽃이 피는 들풀.
  

  #. 이원규 시인(1962년생) : 경북 문경 출신으로 1989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 현재 지리산 자락 오두막집에 거처하면서 시인 박남준과 ‘지리산 지키미’로 자처하며 생명평화운동에 앞장섬.




  <함께 나누기>

  벌써 눈 속에 핀 노오란 복수초꽃 사진이 여기저기 모임방에 올라왔고, 하이얀 노루귀도 짬짬이 보입니다. 우리 집 마당을 둘러보니 소나무 아래에 수선화가 곧 벌어질 준비를 하고, 봄까치꽃도 피려고 연보라빛 꽃망울을 품고 있습니다.
  봄입니다. 봄꽃이 나무뿐 아니라 땅에서도 올라올 시기가 되었습니다. 산과 들이 한창 매무시를 갖추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듯. 지리산 둘레에 사는 시인의 눈에도 봄꽃이 들어왔지 싶습니다. 그러니 필흥 참을 수 없어 붓을 휘둘렀겠죠.

  시로 들어갑니다.

  “저 산은 그 어떤 꽃들도 마다하지 않는다”
  “저 강물은 절대로 분별하지 않는다”
  산과 물은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꺼려하는 독초도 멧돼지도 말벌도 살모사도 다 품습니다. 그렇지요, 사람 아닌 자연이기에. 시인은 그걸 달리 ‘천 개의 손, 천 개의 눈을 가졌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만큼 마음의 눈과 마음의 손이 많아 포용력을 갖췄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깊은 계곡 물소리 들으며 / 얼레지가 쫑긋 연분홍 귀를 내밀고 있다”
  천 개의 눈이라야 모든 걸 다 볼 수 있고, 천 개의 손이라야 모든 걸 다 안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얼레지는 눈도 없이 귀 하나로만도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귀 역할을 해 세상 향한 눈을 뜨고 손을 내밉니다.

  “나 또한 그런 적이 있었다”
  나도 그랬습니다. 비록 두 개의 눈과 두 손뿐이지만 한 사람을 향할 땐 온몸이 통째로 귀가 되고 당신을 쫓는 눈이 되었습니다. 천 개의 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천 개의 손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당신을 향한 올곧은 마음 하나면 족합니다.

  “온몸 단 하나의 손 / 온몸 단 하나의 귀일 때 / 비로소 천 개의 코가 되고 눈이 되고 혀가 된다는 것을”
  산과 물이 그 어떤 꽃들도 마다하지 않으며, 절대로 차별하지 않는 까닭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져서가 아니라 상대에게 헌신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꼭 천 개의 손과 눈이 달려있어야 ‘천수천안’일까요? ‘단 하나의 손과 단 하나의 눈’만으로도 그를 향해 온몸을 던진다면 그게 천수천안일저.

  길가나 풀숲을 지나다 봄꽃을 보면 천수천안이 아니더라도 내게 향하는 단 하나의 손길을 단 하나의 눈길을 외면하지 않으시기를...

  *. 위아래 붙인 사진 둘 다 얼레지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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