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씨는 해도 개명은 하지 않았다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 일본 본토에 가 공부한다는 것이 그다지 욕된 일이었을까 성씨를 고쳐 신고한 날 1942년 1월 29일 그 닷새 전에 시를 썼지 「참회록」을 여백에 낙서할 때의 기분이 어땠을까 ― 시인의 고백, 도항증명, 힘, 생존, 생명, 문학, 시란? 不知道, 古鏡, 비애 금물*
조상을 부정하라고 한다 히라누마 도오쥬우! 하이! 매일 매시간 일본 교수가 출석부 보며 부른 낯선 성 대답할 때마다 떨리는 입술 *육첩방은 남의 나라 내 나라가 아닌데 시를 썼기에 요시찰인물 시를 썼기에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16분 후쿠오카 형무소 캄캄한 독방에서 크게 한 번 외치고 쓰러져 죽었다 히라누마 도오쥬우 윤—동—주—! - [사람 사막](2023년)
*. 첫 ‘*’ 부분은 윤동주 시인이 쓴 시 「참회록」 아래에 적어놓은 낙서. *. 육첩방 : 「쉽게 씌어진 시」에 나오는 시어
#. 이승하 시인(1960년생) : 경북 의성 출신으로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현재 중앙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터넷 문학 [뉴스페이퍼]에 '내가 읽은 이 시를'을 연재하고 있음.
<함께 나누기>
한 사내가 세상에 살다 간 시간은 고작 27년 2개월. 한 사람의 삶치곤 꽤나 짧은 시간입니다. 지금 같으면 대학 졸업할 즈음, 취직 걱정해야 할 시기라 다른 일은 엄두도 못 낼 터. 사내도 대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를 썼습니다. 그 시 때문에 요시찰 인물이 되었고 감금됐고, 고문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허나 사내가 죽은 지 30년도 채 되지 않아 우리나라 시단(詩壇)에 가장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윤동주, 바로 그 사내 이름입니다. 어엿한 ‘파평 윤씨’ 가문 후손이건만 성을 잃어버리고 일본 성인 히라누마[平沼]로 불렸습니다. 그때 그 기분 어땠을까요? 우리가 상대를 욕하는 말 가운데 '근본 없는 놈(새끼)'이 있습니다. 지금은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덕성과 품성이 망가진 인간, 즉 망나니 같은 놈을 일컫지만, 혈통(姓)이 불분명한 사람을 가리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일제에 의하여 윤동주는 졸지에 근본 없는 놈이 돼 버렸습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창씨는 해도 개명은 하지 않았다 /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
창씨(創氏)란 일본식으로 '씨(氏 : 성)'를 만드는 것을 말하고, 개명(改名)은 '이름'을 바꾸는 걸 말합니다. 윤동주는 일제의 광기 어린 전쟁 참여인 징병 피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결심합니다. 당시 일본에 유학 가기 위해선 창씨개명은 필수.
“일본 본토에 가 공부한다는 것이 그다지 욕된 일이었을까”
유학이 일본의 전쟁에 끌려가지 않으려 한 선택이었지만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후의 명작 「참회록」을 씁니다. 그 「참회록」 아래 쓴 ‘도항증명, 힘, 생존, 생명, 문학, 시란? 不知道, 古鏡, 비애 금물’이란 메모는 그의 갈등 한 면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조상을 부정하라고 한다 / 히라누마 도오쥬우!”
일제는 시인더러 근본 없는 놈이 되라고 합니다. 버젓이 파평 윤씨 가문이건만 듣도 보도 못한 히라누마[平沼]란 성씨를 쓰라면서. 일제가 일으킨 전쟁을 피하려 택한 일본 유학, 유학 가기 위해 필수적인 창씨개명, 시인이 얼마나 갈등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내 나라가 아닌데”
시인의 「쉽게 씌어진 시」에 보면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란 시구가 나옵니다. 육첩방은 무얼 말하는 걸까요? 다다미 6장을 깐 좁은 방(약 3평)을 말합니다. 당연히 '다다미방'이니 우리나라 아닌 남의 나라죠.
“시를 썼기에 요시찰인물”
윤동주는 당시 시집을 펴내지 않았지만 시를 잘 쓰는, 특히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시를 쓰는 시인으로 소문이 났답니다. ‘조선인 요시찰 약명부’에 따르면 요시찰 대상은 반일 성향을 지닌 인물로 항상 감시 하에 놓인 조선인을 말합니다.
“후쿠오카 형무소 캄캄한 독방에서 / 크게 한 번 외치고 쓰러져 죽었다”
윤동주의 죽음에 대한 정설은 없으나 현재 의심하는 바는 마루타 - 일본어로 ‘통나무’ -로 생체실험 대상자가 되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즉 당시 전쟁으로 혈액이 부족하자 사람의 정맥에 바닷물 주입해 얼마나 오래 견디는가 실험했는데 그 실험에 윤동주가 마루타로 쓰였다는 설.
“크게 한 번 외치고 쓰러져 죽었다 히라누마 도오쥬우 / 윤—동—주—!”
이승하 시인의 상상이 가미된 부분입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부끄러웠던 ‘히라누마 도오쥬우’를 버리고 자기 이름 ‘윤동주’를 부른 뒤 하늘로 떠납니다. 이승하 시인은 이 시를 쓴 뒤 한참 울었다고 하며, 강의실에서 이 시를 강의하다 역시 울었다는 얘기가 문창과 학생들 사이에 전해오고 있답니다.
*. 첫 인물 사진은 윤동주 님이며, 둘째는 YTN(2023년 7월 18일)에 방영된 마루타 관련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