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호박

목우씨의 '두줄시'(제4편)

* 소녀와 호박 *



어릴 때 내 친구 박호순, 순호박이라 놀림받았지
노란 꽃으로 활짝 핀 예쁜 소녀 눈에 눈물이 맺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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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기>

어릴 때 우리 집 아래 '박호순'이란 여자애가 살았습니다. 시에선 친구라 했는데, 실제론 저보다 두 살 어렸지요. 또래들은 그 애를 볼 때마다 놀렸습니다. 호박같이 생겼다고. 그러면 호순이는 울고.
저는 그때 호순이가 이쁘기도 했지만 워낙 착하여 좋아했는데, 또래 머스마들과 어울리기 위해 놀리기에 동참했습니다. 당시에 머스마들은 여자애들 놀리는 일을 짬짬이 했고, 거기에 동참하지 않으면 ‘가시나’란 별명을 붙이는 바람에 따돌림 안 당하려 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니고 그 애가 여고 다닐 때 하굣길에 우연히 마주쳐 함께 걸어오다 이런저런 얘기 나누게 되었습니다. 순호박 하고 놀리던 일로 화제가 옮겨가자 그 애가 말하더군요. 다른 사람보다 내가 놀렸을 때 가장 서러웠다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그만 잊고 있었는데 그 애는 잊지 못했던가 봅니다. 역시 그렇지요, 가해자는 잊어도 피해자는 못 잊는다고. 당시에 여자애더러 호박처럼 생겼다 하면 면전에 대고 너 못 생겼다는 말과 같았으니 그럴 만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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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또 '호박꽃도 꽃이냐'는 말도 유행어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예쁘지 않은 여자는 여자도 아니다’라는 뜻으로 쓴 표현이었는데... 그러니 박호순은 자기 이름을 거꾸로 부른 ‘순호박’이라는 별명이 너무너무 싫었겠지요. 그날 나는 미안하다 했지만 구차한 변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합니다. 왜 호박이, 아니 호박꽃이 못생긴 여자 가리키는 표현이 되었을까요? 그래서 예쁜 소녀를 울리게 하였을까요? 당시에도 호박을 보고 호박꽃을 보았지만 호박과 못생김을 연결시킬 고리를 찾지 못해 고개 갸우뚱했는데.

요즘 텃밭 들락날락하면서 호박과 호박꽃을 날마다 봅니다. 한창 탐스럽게 달리고 한창 이쁘게 피니까요. 어제도 점점 커져 무게에 눌리면 줄기 썩을까 봐 호박 줄기를 정리하고 호박 아래 짚도 깔아 땅에 바로 붙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또 생각했습니다. ‘참 호박꽃이 이쁘다.’라고. 아니 저 이쁜 꽃을 두고 '호박꽃도 꽃이냐.' 하는 말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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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여자애가 못생겼을 때 비유로 쓰인 또 하나의 과일이 있습니다. ‘모개(모과)’. 저는 모개가 경상도 사투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찾아보니 경상도는 물론 강원도ㆍ 충남ㆍ 전북에서도 썼다고 사전에 나오니 아시는 분들 많겠지요.
그러면 이런 말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니 모개처럼 생겼다.' 당시 이 말을 들으면 여자애들은 팔딱팔딱 뛰었지요. 자기를 못생겼다고 직격하는 말을 듣고 가만있을 여자애가 있을까요? 이러니 또 궁금합니다. 모개가 왜 못생김의 대명사가 되었는지.
다만 '호박꽃도 꽃이냐'란 말은 있어도 '모개꽃도 꽃이냐'는 말은 없었던 걸로 보아 모과꽃을 헐뜯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기야 붉고 화사한 빛깔로 사내 간장을 녹이는 고 예쁜 모과꽃을 못생김에 비유할 수는 없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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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쯤 MBC ‘아빠 어디 가’란 예능프로그램 - 재방송 -에서 아빠 윤민수가 아들 윤후더러 ‘고구마처럼 못 생겼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땐 고구마도 못생김의 대명사로 쓰인 적 있구나.’ 하고 혼자 슬며시 웃었는데.
저는 궁금하면 꼭 해결해야 하는 더러운(?)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서 저보다 오래 산 누님에게 전화해 물었습니다. 아래는 누님의 말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지금은 호박도 모과도 고구마도 반듯반듯하고 반질반질하고 매끄럽게 생겨 그런 흠을 잡을 수 없지만 예전에는 그 세 가지가 참 못생겼다고 했습니다.
즉 호박도 울퉁불퉁 모과도 울퉁불퉁 고구마도 울퉁불퉁해서 다른 작물에 비해 예쁘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나요. 누님의 설명이니까 확실한 답은 되지 않겠지만 그러고 보니 호박과 모과와 고구마가 예전엔 모가 나고 울퉁불퉁하게 생겼음이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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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두줄시’는 우리 아랫집 소녀 박호순(지금은 개명했다고 함)에게 보내는 사죄의 시입니다. 그 애는 착하고 참 이뻤습니다. 그러니 못생겼다고 놀림받을 소녀가 아니었는데 단지 이름 때문에 그리 되었습니다.
박호순, 정말 미안하다. 너를 그때 순호박이라 놀려서. 이제 가만 생각해 보니 네가 하도 이뻐 질투하느라 다들 놀렸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사 고백하지만 나는 너를 은근히 좋아했다. 다만 너무 어릴 때부터 가까이 살아 털어놓기 어색해서 말 안 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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