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75)

제175편 : 오성일 시인의 '눅눅'

@. 오늘은 오성일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눅눅

오성일


김통을 왜 다 열어놓고 먹느냐고

김이 다 눅는다고

밥 먹는 나를 아내가 건드렸다

난 한마디도 안 했다

입천장에 김이 붙어 있었다


잠든 아내의 옷섶을 헤쳐놓았다

가슴뚜껑도 열어두었다

쪽창문을 조금 젖혀두었다


갱년기의 여자

이제부터 긴 건기를 지나야 할 저 여자

달빛에 좀,

꽃숨에 좀,

눅눅해지라고

- [사이와 간격](2017년)


#. 오성일 시인(1967년생) : 경기도 안성 출신으로 2011년 [문학의 봄]을 통해 등단. 현재 KBS본부 ‘수신료 국장'을 맡고 있어 정부에서 추진하는 ’KBS 수신료 분리징수‘ 관련하여 뉴스에 더러 나옴




<함께 나누기>


가끔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습니다. 아 아닙니다, 가끔이 아니라 아주 자주 듣습니다. 어제도 성당 미사 갈 때 소나기 온단 예고에 창문을 다 닫다가 돌아오면 실내가 너무 더울까 봐 에어컨을 28° 약하게 틀어놓고 갔습니다.

나름 멋진 아이디어라 여기며 다녀왔는데 거실이 너무 더웠습니다. 아무리 약하게 틀어놓아도 이렇게 더울 리 없어 온도계 보니 실내온도가 무려 30°. 뒤따라 들어온 아내가 “아니 왜 이리 더워?” 하다가 창문 하나가 열린 걸 보고 마구 야단쳤습니다. "문 열고 갔으니 시원할 리 있어요?" 하면서.


시로 들어갑니다.


“김통을 왜 다 열어놓고 먹느냐고 / 김이 다 눅는다고”


그저께는 감자칩을 먹고는 봉지를 오무리지 않고 그냥 뒀다고 또 야단맞았습니다. 그러면 눅눅해져 맛 없다고. 다시 레인지에 살짝 돌리면 되지 했다가 또 야단맞았습니다. 전기세 들지 않아도 될 일에 왜 돈 들게 하느냐고.


“난 한마디도 안 했다 / 입천장에 김이 붙어 있었다”


화자는 아내의 잔소리에 한마디도 안 했지만 저는 합니다. 교사 출신의 단점은 누구에게 지시받기 싫어한다는 점이랍니다. 늘 아이들에게 이리 하라 저리 하라 잔소리하다가 거꾸로 잔소리를 듣는 처지가 되니 익숙하지 않아서라고 제 딴엔 변명합니다.


“잠든 아내의 옷섶을 헤쳐놓았다 / 가슴뚜껑도 열어두었다”


화자 생각에 아내는 너무 바짝 마른 상태에 있다고 판단합니다. 조금은 눅눅했으면 하는데 잡으면 으스러질 만큼 말라 꿉꿉함이 필요하다고 여긴 듯. 그래서 “갱년기의 여자 / 이제부터 긴 건기를 지나야 할 저 여자” 하고 토를 답니다.


“달빛에 좀, / 꽃숨에 좀, / 눅눅해지라고”


시 끝부분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눈치 챘을 겁니다. ‘아, 이 시가 꼭 아내만을 겨냥한 시가 아니구나.’ 하고. 그렇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너무 바짝 마른 채 만지면 부서질 정도로 시시비비 가리며 사는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바짝 마른 사람과 좀 눅눅한 사람이 대조로 나옵니다. 바짝 마른 사람은 ‘사사건건 따지며 사는 사람’이나 ‘좀 융통성 없이 사는 사람’을 비유한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저도 바짝 말라 건드리면 부서지는 사람입니다. 학교 다닐 때 교실에 책상줄이 삐뚤빼뚤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잔소리했으니까요.


바짝 마른 채로 두면 좋은 거라곤 딱 하나 장작입니다. 항상 뽀송뽀송한 상태로 있어야 불이 잘 붙고 불땀도 좋습니다. 허나 시인은 삶에서의 바짝 마름은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삶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눅눅함이 조금 들어가야 한다고.

우린 그동안 너무 바짝 마른 채로 살아왔습니다. 세파에 너무 찌들려 빠듯하게 살아와서 그리 됐다고 변명해 봅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눅눅한 걸 보지 못한다고. 눅눅하면 뭔가 부족해보여 지적해줘야 속이 시원하다고.


그래서 시인은 이리 말합니다. 만지면 부스러질 정도로 마른 상태라면 습기를 조금 보태 눅눅하게 만듦이 어떠냐고.


(눅눅한 감자칩)


한 편 더 배달합니다.


- 고지서 -


이번 달은 관리비가 많이 나왔습니다

조금 더 쓸쓸했을 뿐인데

홀로 깨어 무언가를 생각하는 밤이 길었을 뿐인데

그걸 계량기 눈금이 읽었던 것인지

귀신같이 관리비가 더 나왔습니다

- [사이와 간격](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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