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편 : 사내(14)
[제23편] : 사내(14)
욕지도 가는 배편은 두 척이 있는데 하루에 각 세 번 편성돼 있고, 오전 여섯 시 반부터 가능하다. 그렇지만 조심해야 한다. 내가 움직이면 놈들도 냄새 맡고 움직이리라.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얻은 정보를 놈들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 그러나 이제 와서 피할 수는 없다. 부딪히면 부딪히는 대로 밀고 나가리라, 다만 전보다 더 조심해야 할 테지만.
집을 나설 때부터 따돌리지 않으면 나중에는 힘들 뿐 아니라 한 번 의심하게 만들면 그 다음이 문제. 우선 복잡한 곳으로 가서 사라지기로 했다. 성공적이었는지 통영까지 오는데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의심할 만한 인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친김에 배를 탔고, 타서도 주의를 기울였으나 나이 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그제사 마음놓았다.
눈을 감는다. 배가 파도에 흔들려 멀미가 났기 때문도, 볼 만한 경치가 없어서도 아니고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시간을 오직 그녀의 현재만 생각하고 싶어서. 허나 아무리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도 왜 갔을까에 대한 답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데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한 답은 알 수 없다.
종이접기를 가르치는가. 교실 창안으로 들여다본 그녀의 모습은 전과 변함없다. 종이를 만지는 아이들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해맑은 웃음을 만들어 내는 그녀는 정말 천사 같다. 얼굴을 마주 봄이 그 사이 이룩한 작은 행복을 깨뜨리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 그대로 돌아갈까 하는 망설임이 순간적으로 일어났지만, 보지 않으면 모르되 보고서는 도저히 그대로 갈 수 없다.
우연히 이쪽으로 돌리는 눈과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가 호동그레하게 커진다. 이내 몸을 홱 돌리는 가운데서도 반가움의 눈빛 읽음은 너무 주관적인 해석일까. 복도를 나와 자그마한 운동장 한 귀퉁이에 자리한 몸무게를 다 지탱하기엔 다소 부족한 그네에 앉았다. 옆으로 늘어진 홰나무 그림자마저 늦가을의 쌀쌀함을 밀어내며 따스하게 느껴진다.
저만치서 프릴이 달린 긴치마가 살랑살랑 흔들리며 걸어온다. 일어났다. 마음 같아선 달려가 껴안고 싶지만 야트막한 담장 너머 지나가는 아낙네들과 교실 안에서 이쪽을 내다보는 호기심 어린 눈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녀가 옆자리 그네에 앉는다. 그녀 손 위에 손을 겹쳐 얹는다. 파르르 한 떨림이 가늘게 느껴진다. 무슨 말을 꺼내려는 걸 집게손가락을 그녀 손바닥에 꾹 눌러주자, 그녀가 이내 내 의도를 알았는지 잠자코 있다. 우리는 그렇게 말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냥….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괜찮아….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냐 너 때문이 아냐.
정말 건강에 아무 이상 없는 거죠?
없어. 수나도 전보다 좋아 보이진 않아. 힘들어?
아뇨, 주위 사람들이 너무 편하게 대해 줘요.
그럼 내가 괜히 왔는 것 같은데.
질투하세요, 제가 편하게 산다니까?
그게 아니라 나 때문에 네가 이제 불편해지잖아.
아녀요, 들켜서 이 자그마한 행복조차 위기에 빠진다 해도 전 당신이 먼저 왔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기뻐요. 사랑해요.
사랑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심장의 박동마저 손을 통해 전달되는 듯하다.
“괜찮아. 네 탓이 아냐.”
“괜찮대두, 난 오히려 그이가 찾아와서 좋은 걸.”
“내가 원래 내숭이잖니. 너 몰랐어?”
“그래 고마워.”
숟가락을 들다 말고 수나의 입만 바라보았다. 얼굴 봤으니 돌아가겠다고 하자 그녀의 눈에 슬픔이 잠시 머물더니 오래 붙잡지는 않겠지만 저녁은 반드시 먹어야 보내주겠다고 하는 걸 못 이기는 척 따라와 식사를 하던 중에 부산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 온 모양이다.
“왜 웃으세요?”
‘내숭’이란 말에 슬며시 웃음 지은 걸 갖고 따지는 말이리라. 친구의 시어머니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봤는지 모르지만 영휴를 데리고 옆집에 놀려가겠다 하여 둘만 있는 자리다.
“수나가 내숭 떤다 하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해서.”
“왜요? 제가 얼마나 내숭 많이 떠는데….”
다시 빙긋이 웃었다.
“믿기지 않으세요?”
살짝 숙인 고개를 들어 입술을 도토마니 내밀며 얘기하는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
“나도 여기서 같이 살까?”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며 밝음이 사라진다. 그리고 정색하며 말했다.
“안 돼요. 당신은 거기서 살아야 해요. 그것이 우리가 그나마 사랑을 머금고 살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에요.”
“알아, 무슨 뜻인지. 그런데 말이야 널 안 봤으면 모르겠지만, 아니 이 말은 잘못된 말이고 어떻게든 찾아다녔을 테니까. 널 보는 순간 내가 그동안 어떻게 떨어져 살았는지 의문이 들거든. 안 되겠어. 돌아갈 수 없어. 아니 돌아가지 않겠어.”
“안 돼요, 그건 절대로 안 돼요. 오늘은 제가 붙잡았지만 내일은 꼭 돌아가셔야 해요. 아까 제가 한 말 다시 해 드릴게요. 그 길만이 우리가 그나마 사랑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말.”
더 이상의 실랑이를 끝낸 건 밖에서 들려온 ‘어머니’ 하는 소리 때문이다.
방이 두 개뿐이라 그녀와 친구 시어머니가 한 방을, 아들과 내가 한 방을 쓰기로 한 뒤 아들이 잠드는 걸 보고 밖으로 나왔다. 빤히 보이는 곳이지만 집에서 바닷가까지 천천히 걸으면 한 십 분쯤 걸릴까. 그러나 그 시간보다 더 멀게 느껴짐은 밤안개 때문이리라.
안개가 살며시 열었다 닫았다 하는 와중에서도 바닷바람이 ‘쏴’ 하니 가슴을 엄습한다. 띄엄띄엄 아직 잠들지 않은 집들에서 배어 나온 불빛이 어스름 달빛과 어울러 한결 고즈넉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아까 그녀에게 한 말 그대로 보지 않았으면 모르되 본 이상 뭔가 분명한 태도를 정해야 한다.
어떤 길이 최선인가. 이대로 그냥은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떼를 쓰며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좋은 방책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방도가 있어야 할 텐데…. 갑갑하다. 올 때는 그녀 얼굴만 볼 수 있다면 더 이상의 꿈이 없다는 생각이었는데, 이제 보고 나니 더 이상의 바람이 덧붙는다.
저 멀리 갯바위들이 어둠 속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파도는 바깥바람과는 달리 잔잔하다. 이대로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것만은 어길 수 없다, 절대로. 무엇이든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그녀가 동의하는 범위에서 좋은 방안을 찾아야 한다, 내일까지는.
회사에 낸 월차도 하루밖에 안 된다는 걸 억지로 이틀 더 얻었다. 여기서 완전히 세상을 등지고 그녀랑 같이 살 수는 없을까. 그녀가 동의만 한다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내랑 집의 아이들이 생각나지 않은 건 아니나 지금의 입장에선 그들은 두 번째다, 어떤 비난과 어떤 모욕적인 말을 듣더라도. ‘미안하다,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만 무수히 그들에게 들려줄 수 있을 뿐. 허나 이 계획은 그녀가 동의하지 않을 터.
그때 저만치 앞에 꼭 사람 닮은 갯바위가 보인다. 고개를 바다 쪽으로 향한 채 가만히 앉은 형상이랄까.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봤다면 이름을 망부석(望夫石)이라 붙였음직하다. 그런데 가까이 갈수록 이상한 느낌이 든다. 마치 바위가 살아 있는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가.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바로 곁에 와서야 사람임을 깨달은 건 안개도 한몫 했지만 너무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여인이다. 어둡고 조금 떨어진 데다 고개를 바다 저쪽을 향해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지만 분명히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의 형상이 여인임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다.
그냥 지나치려 했다. 궁금한 마음이 없진 않았으나, 낯선 곳에서 낯선 여인과 말을 주고받기엔 이 시간은 결코 적당한 때가 못 되니. 허나 지나칠 수 없다. 아무리 어둡고 안개 때문에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한들 어찌 모를 수 있으랴. 곁에 슬그머니 앉자 화들짝 놀라다가 나임을 확인하자 더욱 눈이 똥그래진다.
“어 어떻게…?”
“텔레파시가 통했지. 우리가 이런 적이 한두 번이었어?”
“그래도…”
그녀의 눈은 내가 의도적으로 뒤를 밟아왔다고 여기는 기색을 듬뿍 담는다.
“우리는 절대로 떨어질 수 없다고 했잖아. 수나가 어딜 가도 나는 찾을 수 있어.”
그런 말에도 그녀의 얼굴은 밝은 표정이 아니다.
“아까 멀리서 수나를 보았을 때 망부석 하나가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는 줄 알았어. 가까이 다가와서야 수나인 걸 알았을 때의 심정은…”
그래도 그녀의 얼굴은 펴지지 않는다. 분위기를 바꿀 필요를 느꼈다.
“멍부석 전설 들어봤어?”
“멍부석? 망부석 전설이야 알지만…”
“수나를 보니 갑자기 멍부석 전설이 떠오르는군.”
“또 농담하시려구요.”
그제사 그녀의 눈에 미소가 돌며 얼굴에 밝음이 묻어난다.
“농담 아냐. 듣고 싶어?”
“…네.”
“옛날 어느 마을에 한 여자를 짝사랑하는 사내가 있었어. 그러나 그 사내는 자신의 사랑을 고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얼굴을 마주쳐도 안 될 사이였어. 그녀는 남의 아내였거든. 그렇지만 사내는 그녀를 곁에서 잠시라도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지.
그러던 어느 몹시 추운 날 그녀가 모처럼 친정에 다니려 갔다가 온다는 소식을 접했지. 사내는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멀리 마중 나갔어. 물론 시집에선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는다는 정보도 미리 확보하고서. 사내는 기다렸지. 삭풍이 몰아치고 눈보라가 날려도 기다렸지. 이 추위 속을 그녀가 온다고 여기면서.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 참고 기다렸지.
그러나 그날따라 여인이 친정에서 오려 했으나 너무 날씨가 나빠 오기를 뒷날로 미루었지만 그런 사실을 알 수 없는 사내는 여인이 온다고 여긴 채 무작정 기다렸지. 해가 지고 날은 더욱 추워지고 눈보라는 더욱 거세졌지만 사내는 단념을 않고 기다렸지. 그렇지만 결국 여인은 오지 않고 사내는 몸이 차츰차츰 얼어갔어.
다음날 동네 사람들이 발견했을 때 사내는 여인이 오는 방향을 향해 얼음바위가 되어 있었어. 그때부터 그 마을에서는 사내가 있던 그곳 바위를 가리켜 멍부석이라 불렀던 거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쫓았던 멍청한 사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기다리다 굳어 돌이 되어서 붙은 이름으로. 물론 이때의 ‘부’는 지아비 ‘夫’가 아니라 지어미 ‘婦’가 되겠지만.”
“에이, 지어내긴 잘도 지어내신다.”
하며 내 가슴을 주먹으로 콩콩 친다. 그리고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어난다.
“수나에게 웃음은 어울리지만 슬픔은 어울리지 않아. 늘 웃어야만 해. 절대로 눈물을 담아서는 안 돼.”
그녀의 눈엔 다시 어둠이 담긴다. 마음 여린 여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벅차리라.
“같이 돌아가자고는 하지 않겠다. 나 내일 혼자 돌아가겠어. 그렇지만 나는 네게 다시 돌아온다. 이곳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너와 같이 있을 것이다, 영원히.”
조심하느라고 했는데도 조심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 있음을 깨달았다. 회사에서 돌아와 차를 골목에 주차시킨 뒤 문을 열고 닫으려는데 등 뒤에 섬뜩함을 느꼈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가만 계십시오. 이진수 씨 맞습니까?”
아찔하다. 이제 이판사판이다. 재빨리 몸을 돌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의외. 뒤에선 아무 반응이 없다. 아무리 내가 빨리 움직였어도 뒤에서 공격한다면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첫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몸을 최대한 구부린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는데. 저쪽에서 주먹이나 발로 가격하는 대신 말로 가격했다.
“형님, 맞는가 봅니다.”
예상 밖으로 진행되는 상황에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몸을 추스르며 바로 세웠다. 헌데 저쪽 한 모퉁이에서 몸을 드러낸 ‘형님’은 내가 지레짐작한 형님이 아니다.
“술 한 잔 하시겠소?”
“난 솔직히 당신이 밉소. 아니 죽여버리고 싶소. 내 누님을 아프게 하고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으니.”
짱구, 아니 손병철은 술집으로 데려와서는 다른 말 없이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석 잔을 들이켠 뒤 나를 노려보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고마운 점도 있지. 남의 아내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물러설 결심을 했는데 당신 때문에 미련을 가져도 되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아 그 문제는 차차 얘기하기로 하고, 우리 누님 지금 어디 있소?”
“난 모르오.”
그러자 녀석은 바짝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며,
“회사에서 월차 내고 어딜 다녀오셨더군요. 어딜 갔다 오셨소?”
“그건… 집안일 때문에…. 참 내가 왜 그런 사적인 얘길 당신에게 해 줘야 하죠?”
“우리 누님 일이니까.”
칼로써 생선을 두 토막 내듯이 바로 자르고 드는 말에 형사부장인 친구가 한 얘기 - 일본 야쿠자 부두목이란 얘기 -가 생각나 조금 주눅이 들었지만 그대로 밀릴 수 없다.
“당신 누님과 관계없는 아주 사적인 일이었소.”
“욕지도에 갔다 왔지요?”
술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도대체 이들에게 비밀이 존재할 수 있을까. 소름이 쭉 끼친다.
“이런 얘기 당신에게 털어놓을 필요가 없지만, 우린 몇 가지 이유로 하여 누님 남편이란 사람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소. 해서 그 친구가 정치에 매우 미련을 갖고 있음도 알게 되었고. 그런데 당신도 신문이나 TV를 통해서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며칠 전 자기가 줄 대려는 당의 사무총장이 비리에 연루되어 사법처리 대상이 되고 말았소. 그의 줄이 끊어진 거요. 무소속으로라도 출마하겠다고 하지만 그건 지금 막가는 심정으로 하는 말이지 결국은 포기할 거요. 그러다 보니 한 가지 바람직하지 않은 문제가 생겨났소. 짐작할 수 있겠소?”
감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잠자코 있자니,
“그 친구는 이제 대중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요. 다시 말해서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순간 다시 옛날의 생활로 돌아갈 거요. 이제 알겠소?”
섬뜩하다. 말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바람에 얼른 대꾸를 하지 않자 내가 눈치채지 못한 걸로 알았는지,
“제법 머리 돌아가는 분인 줄 알았더니…. 누님이 위험해진 거요, 당신 때문에. 위험해요, 그곳은. 너무 외진 곳이라 프로들이 하고자 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곳이오. 당신이 길을 내놓았기에 내가 알게 되었고, 남편도 알려고 들면 시간문제요. 당신은 그들의 시선 속에 항상 있었으니까.”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 뒤 손병철이 나더러, ‘솔직한 심정으론 죽여버리고 싶다’는 말을 한 번 더 들었어도 그것보다 그녀가 처할 위험 때문에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수나를 해치고자 하면 진짜 그녀는 파리 목숨이었으니...
(다음 호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