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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Sep 10. 2024

[장편소설] 삼백아흔 송이 장미꽃(25)

제25편 : 여자(15)

  [제25편] : 여자(15)



  “그이가 어떻게 됐어? 알아봐 줄 수 없어?”

  “누님 잊으시오, 누님 자신도 아직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오. 그 사람을 잊어야 해요. 누님이 살려면 무조건 잊어야 해요.”

  “내 목숨은 아무래도 좋아. 그것보다 그이가 어떻게 됐어? 너는 알려면 알 수 있잖아.”

  “참 누님도, 내가 첩보원이오?”

  “아냐 넌 알고 있을 거야. 응, 빨리 가르쳐 줘.”

  “좋지 않소, 누님 남편에게 잡혀 있다니까.”

  짐작은 했지만 막상 알게 되니 소파에 앉아 있는데도 몸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 같다.


  “정말이야?”

  “그래서 내가 잊어라 하잖소.”

  “아냐, 그이를 살려야 돼.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이를 살려야 돼. 제발 살려 줘.”

  “내게 그런 능력이 없소. 아니 있다고 해도 엄청난 손실이 감수하며 그런 일을 할 수 없소.”

  “제발 부탁이야, 그이를 살려 줘.”

  그가 담배를 부쳐 물고 두 눈을 꼿꼿이 한 채 이쪽을 향한다. 그의 눈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부탁을 해야 하는 내가 오히려 시선을 피해야 했다.


  “옛날 얘기 하나 할까요. 예전에 한 소년이 있었소. 지극히 불량한 환경에서 지극히 불량한 애들과 지내야 했소. 그리고 그 불량한 애들 속에서 그 소년은 점점 더 불량한 소년이 되어 갔소, 삶의 의미와 목적과 방향을 상실한 채. 그러던 어느 날 그 소년에게도 낙이 생겼소. 한 명의 천사를 본 거요. 쓰레기더미 속에서 피어난 백합 같은 천사를 본 것이오. 그제사 그 소년은 살아갈 의미를 가진 거요, 의미를. 그러나 그 소년은 천사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헤어져야 했소.

  세상은 소년에게 평탄한 길을 마련해 놓은 게 아니라 자갈밭길, 가시밭길을 마련해 놓았던 거요. 길거리를 떠돌다가 눈물밥을 먹고, 그러나 그 눈물밥조차 마음대로 먹지 못한 채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결국은 낯선 이국땅에까지 가게 됐소. 거기서 소년은 이전의 눈물밥이 아닌 피밥을 먹어야 했소. 단 하루도 피 그칠 줄 모르는 세계에서, 열 번도 넘게 목숨이 오락가락 상황에서 버텨낸 것은 오직 천사를 보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소. 이 일념 때문에 살아났고, 이 일념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차지했소. 이제 얼마 후 양아버지가 은퇴하면 그 자리를 물려받을 위치까지 말이오.

  비로소 몸을 빼낼 여유를 얻게 된 소년은, 아니 청년은 옛날 살던 나라로 돌아왔소. 명분은 업무지만, 실제 목적은 천사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 그리고 보았소, 천사를.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답고, 여전히 착했소. 당연히 남의 아내가 되어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막상 알고 나니 너무나 허무했소. 한순간 빼앗아버리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있었소, 우리 세계에선 흔한 일이니까. 물론 남편이 대단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건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었소. 하지만 그럴 수 없었소. 천사를 천사로 보고 싶었기 때문에.

  헌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오? 그 천사가 남편 아닌 딴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던 거요, 어느 모로 보나 별로 나아 보이지 않는 그런 남자를. 실망했소. 정말 실망했소. 그러나 한편으론 기회다 싶었소. 이젠 내가 차지할 명분이 생겼단 말이오, 이십 년 넘게 간직한 사랑을 차지할. 그런데 그 천사가 지금 뭐라고 하는 줄 아오. 자기 애인을 나더러 살려 달라는 거요. 그 남자가 없어지면 라이벌이 없어지는데 말이오. 그러니 내게 방법이 있다 해도 들어주겠소?”


  그가 파티마에서 나를 좋아했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나 나를 그만큼 못 잊고 있다는 그의 고백에 한동안 말을 잊었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나 같은 여자를 뭐가 좋다고…. 하지만 지금은 나를 좀 도와줘, 응?”

  “이젠 곤란하오. 내 마음을 고백해서가 아니라 이런 얘기까진 할 필요가 없으나 누님이 하도 그러니까 하는 말이오. 우린 이곳 패거리 두 곳 중에 어느 곳이든 한쪽과 손을 잡아야 하오. 처음엔 누님 남편 반대편과 손을 잡으려 했는데, 그쪽에서 너무 심한 요구를 하기에 이쪽과도 의견을 조율 중이오.

  어느 쪽이든 우리에게 유리한 쪽을 택할 것인데 만약에 누님 남편과 손을 잡게 되고, 그리하여 내가 한 짓을 그쪽에서 알게 되면 어떻게 되겠소? 우리 조직이 막대한 타격을 입어요. 따라서 누님 심정은 이해하지만 안 되오. 누님만 빼돌린 것만 해도 사실 모험이었소.”


  앞이 캄캄해진다. 주먹쟁이 남편을 둔 덕에 그들 세계에 관해 여느 여자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진 게 이 순간을 더욱 막막하다. 그들에게는 한 개인의 문제보다 조직이 우선이다. 그렇지만 겨우 잡은 지푸라기를 놓칠 수 없다.

  “제발 제발 무슨 일이든 할 테니 나를 도와줘.”

  “방금 무슨 일이든 한다고 했소?”

  그의 되받아치는 말에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시위를 떠난 활.

  “그래 그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

  “다시 한번 묻겠소. 무슨 일이든 다 하겠소?”



  그이를 다시 만난 건 이틀 뒤. 따라가자 하여 따라간 후미진 곳에 눈을 감고 앉은 그이는 당초에 우려했던 상태보단 훨씬 양호해 보인다. 얼굴 몇 군데 폭행의 흔적이 있으나 나중에까지 흉터로 남을 것 같지 않고, 특히 인기척에 뜬 눈의 눈동자가 살아 있다. 나를 보자마자 일어서려는 걸 도로 앉히며,

  “괜찮으셔요? 어디 심하게 다친 데 없어요?”

  “괜찮아, 안면 있어선지 이번에는 가볍게 손을 봐주더라.”

  하는 그이의 농담이 하나도 우습지 않다.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걸 진작 깨달은 바 있어서. 재차 일어서려는 그이를 부축하려고 겨드랑이에 손을 넣는데 그이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다.

  “허리를 다쳤어요? 예?”

  “괜찮아, 이 정도는. 우리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 중에 가장 값진 게 바로 이 튼튼한 몸뚱이야.”


  계속 너스레를 떠는 그이가, 그러나 괜찮을 정도라고 생각할 수 없다. 의식적으로라도 내게 아픈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할 텐데 무의식 중에 내색을 한 건 극히 심한 부상을 입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 이젠 정말 헤어져야 한다. 한 번 더 이런 경우에 처하면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 무조건 헤어져야 한다. 그 길만이 그이를 살릴 수 있다. 그리고 잊어야 한다. 도저히 잊을 수 없지만 잊는 척이라도 해야 그이가 살 수 있다.

  짱구와의 계약은 처음에는 도저히 허락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그이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판단에 택할 수밖에 없었다. 계약에서 얻은 열흘의 말미 뒤에 차마 못할 짓을 하게 되더라도 그건 그때 문제. 그이가 살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리라. 아니 해야 한다. 그와 함께 탄 차에서 안색을 굳힌 채 말문을 연 것도 그런 결심의 하나다.


  “지금이라도 우리 정말 잊기로 해요. 제가 그 사람에게 사정할게요. 이제 다시는 당신을 만나지 않겠다고. 그것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에요.”

  “네 말을 그 짐승이 들어줄지 안 줄지 몰라도 만약 너를 잊어야만 한다면 그건 살아도 산 목숨이 아냐. 그럴 바에야 차라리 원껏 너를 사랑하다가 죽고 싶어.”

  “안 돼요, 제가 죽으면 제 한 몸만 없어지는 걸로 끝날 수 있지만 당신이 죽으면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어요. 우리 이제 정말 잊어야 해요. 당신이 끝내 잊지 못한다면…”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않고 모질게 말하려 했는데 또 말을 잇지 못하고 만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 있어, 사람이 컴퓨터와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컴퓨터는 어느 한 부분을 원하기만 한다면 지우는 '딜리터(delete)'가 있거든. 하지만 사람은 달라. 사람의 기억 속에 든 그리움은 절대로 지울 수 없어. 왜냐하면 거기에는 딜리터도 '백스페이스(backspace)'도 없어. 신은 인간을 만들면서 뇌에 그 두 가지 넣는 걸 잊어버렸나 봐. 그러므로 우리 서로 잊는다는 건 포기해.”


  (다음 호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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