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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Sep 11. 2024

[장편소설] 삼백아흔 송이 장미꽃(26)

제26편 : 사내(16) + 여자(16)

  [제26편] : 사내(16)



  아무도 없으리라 여기고 들어선 집에 의외로 아내가 있다.

  “지금은 날 이해할 수 없겠지?”

  “아뇨, 지금뿐이 아니고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식사만 차려 놓고 방으로 가려는 아내를 불러세웠다.

  “이런 얘긴 당신 자존심 건드리는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나로선 너무 급박하거든….”

  무슨 얘기냐는 듯 빤히 바라본다.

  “따라서 당신이 꼭 들어줄 필요는 없어. 하지만 달리 부탁할 곳도 없으니 당신한테 부탁할 수밖에….”

  아내의 눈동자가 비로소 심각해진다. 그러나 입은 열지 않는다. 어떤 경우라도 직접 반응하기 보단 일단 한 번 생각한 뒤에 반응한다는 것은 아내의 강점이다.


  “나 인도로 가고 싶어. 전에 얘기했지만 친구 박 부장이 오라고 해. 아니… 어차피 속여 봐야 들통 날 거고, 그러면 나란 인간은 더욱 치사해 질 거고. 나 그 여자를 살리고 싶어. 그 여자는 이 나라를 떠나지 않으면 죽어.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 홀로 가서는 살 수 없는 여자야. 빨리 나갈 수 있게 삼촌에게 좀 부탁해 줘.”

  사람의 얼굴빛이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이 변할 수 있을까. 아내는 처음에 노랬다가, 하얗다가, 시뻘겋게 변한다. 그리고는 한참을 나를 뚫어지듯이 바라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지금 저더러 당신 사랑의 도피 행각을 도와달라는 말이에요? 아내에게 정부(情婦)와의 도피행각을 도와달라는 거예요, 당신이?”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은 없어. 나더러 비열한, 아니 염치없는, 은혜를 모르는, 치사한 더러운…. 어떤 욕이라도 좋아, 부탁해. 제발 부탁해.”



  인도 현장 발령을 받은 건 닷새 뒤. 아내를 통해서가 아니라 처삼촌이 부른다기에 갔더니,

  “그래 이번 참에 심기일전하도록 해. 기한은 2년 잡아놓았지만 그보다 더 일찍 들어오고 싶다면 얘기해, 언제든지 불러들일 테니. 어쨌든 마음 다잡고 새로 출발한다고 하니 다행이야. 은지 에미는 내가 있으니 염려 마.”

  떠나기 전에 제 삼촌 집으로 간 아내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했다. 그러나 아내는 만나기를 끝끝내 거부하면서,

  “당신을 위해서도 그녀를 위해서도 아닌, 아들딸에게 애비 없다는 소릴 듣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한 결정이므로 하등 고맙게 여길 필요는 없다.”는 말을 끝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부서장인 박 이사를 통해 알려지겠지만 떠나기 직전까지 인도 파견근무 건을 알리지 말아 달라 한 덕인지 아직 소문이 안 나 사무실 분위기는 그대로다. 편집실에 들렀더니 미스 리가 보인다.

  “전에 유치원 교사 한다는 친구 있다고 들었는데…?”

  “네 그래요, 지금도 하고 있어요.”

  “혹 종이로 꽃 만드는 방법 알고 있을까? 아무래도 어린이 대상이라 그런 걸 알지 싶은데 말이야.”

  “알아보는 거야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무슨 일로…?”

  “그 친구 전화번호만 알려주면 돼…”


  미스 리 친구로부터 종이로 꽃 만들기를 자기도 할 수 있지만 전문적으로 만들어 파는 가게가 있다는 정보를 얻어냈다. 직항은 사흘 뒤라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하기에 일본을 경유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날이 바로 그녀 생일. 생일을 챙겨줄 수 없어 하늘에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 아프다. 다른 이들보다 더 애닯은 생일 아닌가. 꽃을 미리 주고자 하나 공항 여객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불가능. 공항에서 만나 줘본들 비행기 탈 때는 안고 탈 수 없고. 그래서 만들어낸 꾀가 종이꽃.

  그녀 생일이 10월 7일임은 이미 저장해둔 터. 고아인 그녀에게 그날이 진짜 생일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기가 그날을 생일로 여기고 있다면 바로 그날이 생일 아닌가. 백과사전을 뒤졌더니 그날 탄생화는 전나무. 꽃이 아닌 게 아쉽다.

  그러다 혹시나 하여 가톨릭 신자인 직원에게 그녀의 세례명 ‘로사리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고 물었더니 단번에 답이 나왔다. 로사리아는 라틴어로 영어 ‘rose(장미)’란 뜻을 지니며 성모님의 상징으로도 쓰인다고. 그러자 유난히 장미꽃을 좋아하던 그녀가 생각났다. 유치원 찾았을 때 다른 꽃을 다 누른 장미꽃이 만발했으니까.




    - 여자(16) -



  처음에는 절대로 응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같이 가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그이의 협박(?)과 짧은 기간 동안 험한 일을 겪으면서 얻은 심리적 피로에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그냥 동의하고 말았다. 사실 한 가지 더 있다. 그이를 살리기 위해서 짱구의 요구에 응하기로 한 일. 화장실 가기 전의 심정과 갔다 온 뒤의 심정이 다르다던가. 그때는 그이를 살릴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다는 마음이었는데 막상 약속 이행 날짜가 다가오면서 도저히 그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이가 마련해 준 호텔에 몰래 들어갈 때까지 아무 일 없었고, 이럴 때를 대비한 건 아니지만 비자를 미리 발급받아 놓은 일도 천만다행. 몸만 빠져나오면 모든 건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그이의 말대로 뉴델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다만 뉴델리로 직항하는 비행기는 며칠 뒤라 빨리 빠져나가려 일본 오사카를 경유한 비행기를 타야 했는데 그거야 어차피 이 나라 떠난 뒤의 일이 아닌가.



  비행기가 날고서야 비로소 긴장이 풀린다. 그이가 내 손을 슬며시 잡는다. 어깨에 기대고 싶은데 아들이 곁에 있어 자세를 바로하며 손만 잡았다. 그리고 기내에서 휴대폰을 꺼야 한다는 상식이 생각나 탑승 전에 끄려는데 문자 메시지가 하나 떠 있다.

  ‘누님 정말 사랑했습니다. 전 배신자는 용서 안 한다는 규율 속에 살아왔습니다.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속으로 남기며 오사카 발 비행기가 뜨자 그제사 긴장이 완전히 풀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제 그이와 함께 둘만의, 아니 영휴를 포함하여 셋만의 시간을 영원히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이제 꿈이 아니다. 허벅지를 꼬집어볼 필요도 없이 분명히 꿈이 아니다.



  스튜어디스가 카트를 밀며 다가왔다. 그이 몫으론 와인, 영휴 몫으론 콜라, 내 것으론 주스를 시키려는데 스튜어디스가 말했다.

  “제가 어떤 분의 부탁을 받고 이걸 드리고자 하는데요…”

  하며 엄청나게 많은 장미꽃 다발을 내 앞으로 내미는 게 아닌가.

  “이게 뭐예요?”

  생화는 아니다. 하기야 비행기 안에 생화가 어디 있을까. 만지니 종이꽃.

  “절더러 편지도 읽어드리라고 했으니 들으시면 아실 거예요.”

  하면서 스튜어디스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려는 듯 잔기침을 한다.


  “… 당신은 하늘이 낳은 여인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고 싶었습니다. 오늘 당신의 서른아홉 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내 사랑을 담아 삼백아흔 송이 장미꽃을 바칩니다. 생화 아닌 종이꽃이라 열 배로 주는 건 아닙니다. 당신의 한 해는 다른 이들의 십 년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이었습니다. 더 큰 선물은 인도 내리면 드리겠지만 지금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 생각하여 드리니 기쁘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이런 사랑을 받아봤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군요.”


  하며 스튜어디스가 부러워하며 쪽지를 내게 건넸다. 맨 끝에 보낸 이의 이름이 적혀 있다.

  … 이진수 …

  “당신 정말…”

  나는 말을 채 잊지 못하고 그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한없이 울었다.


  (다음 호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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