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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Sep 09. 2024

[장편소설] 삼백아흔 송이 장미꽃(24)

제24편 : 여자(14) + 사내(15)

  [제24편] : 여자(14)



  한밤중에 날아드는 신호음에 화들짝 놀라 잠을 깼지만 한동안 수화기를 받을 엄두를 못 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 올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있다고 해도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아직 온 정신이 아닌 상황에서도 퍼뜩 상기되어서. 열 번이 넘은 것 같은데도 울리는 신호음에 결국은 들고 말았다. 나쁜 일이라도 알아야 할 건 알아야 한다.

  “누님, 지금 빨리 짐 싸셔요!”

  친구 아니면 그이, 그이도 아니면 그 사람일 거라 여겼는데 뜻밖에 짱구다.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왜?’냐고 묻는 물음에 내일 날이 밝으면 첫 배로 애 아빠가 그곳으로 갈 거라는 말. 소름이 쫙 끼치는 걸 참으며 다시 어떻게 이곳을 알았냐고 묻는 물음에 그게 지금 뭐 중요하냐면서 다시 한번 지금 빨리 짐을 싸라는 지시. 그래 지시다.


  사실 얼마 안 되는 짐 싸는 건 별일 아니다. 문제는 이 밤중에 짐을 싼들 배가 운행되는 내일 아침까지는 빠져나갈 수 없다. 그 점을 얘기했더니 배는 이미 마련해 우리 애들 몇이 그곳으로 가고 있으며 아마 삼십 분 후쯤 도착할 예정이니 애 하고 빨리 포구로 나오라고만 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얘기하지 말라고. 특히 그이에게 연락하다간 들통 날 수도 있으니 ‘절대로’란 말을 반복했다.




     - 사내(15) -



  짐승이 알기 전에 두 모자를 다른 곳으로 숨겨야 했다. 다시 이틀 월차를 신청했다. 박 이사의 번들거리는 이마가 일그러지는 걸 느꼈지만 무시했다.

  항상 내 뒤를 주시하고 있다는 짱구의 말이 아니더라도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회사에서 빠져나올 때 일부러 외부로 나가는 화물차에 올라탄 것도 그런 이유에서고, 내 차를 버리고 콜택시로 통영까지 간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완벽한 ‘뿌리치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욕지도 가는 배에 올라타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 배에 올라타고서야 긴장감이 풀리며 졸음이 몰려온다.


  배에서 내리는 순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한눈에 느껴진다. 이런 섬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에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선 두 놈과, 거기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네 놈. 특히 그중 두 놈은 과거의 인연(?)으로 하여 안면이 익은 처지.

  배는 이미 정박해 있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다른 섬으로 헤엄쳐가지 않는 한 여기서는 달아날 곳이 없다. 죽을 때까지 싸우든, 바다로 뛰어드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제 삼을 택했다. ‘나’가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문제여서.


  “기다리고 있었는가 본데 하나만 물어보자. 그녀는 어떻게 됐지?”

  그 뒤 몇 마디 더 주고받았지만 쉽게 타협을 했다. 나로선 섬마을 사람들에게 살벌한 꼴을 보이기 싫은 데다 그녀 행방을 아는 게 목적이고, 저들은 나를 ‘형님’ 앞에 데려가는 게 목적이니. 다만 형님과 만날 때까지는 서로 곱게 있자고 한 약속은 그들이 몰고 온 배에 올라타는 순간 깨져버렸다. 뒤통수를 뭣으로 맞았는지 충격을 느끼는 순간, 의식은 사라졌다.



  “또 만나는군. 우린 인연이 깊은가 봐.”

  억지로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떴다’ 하면 내 의지에 의한 행동이 되니 잘못된 표현이고, 찬물세례를 받고 저들에 의해 눈이 떠졌다고 해야 옳으리라.

  “어떤 놈이지?”

  가물가물하는 의식 속에서도 그녀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는 걸 느끼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네놈이 거기 간다는 정보는 맞았는데 그년이 아직 거기 있다는 정보는 틀렸어.”

  무슨 말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아 내가 거두절미하고 말하는 바람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모양이군. 오늘 새벽에 웬 놈에게서 전화가 왔어. 그년이 거기 있는데 네놈이 아침에 거기로 데리려 갈 거라고. 확인하려는데 그쪽에서 끊어버리더군. 애들에게 들으니 이미 그년은 어젯밤 토꼈다더군. 도대체 어떤 놈이야?”


  짱구다. 짱구가 빼돌렸다. 무슨 이유에서 그녀는 빼돌리면서 나를 곤경에 처하도록 했는지 몰라도 일단 그녀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면 여유 있는 쪽은 이쪽이다.

  “정보라면 나보다 훨씬 위인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개새끼!”

  미리 방향을 틀었는데도 머리가 쪼개지는 충격을 받았다. 그 한 방으로 하여 이전에 정당한 일대일 대결이면 승산이 있으리라 생각한 게 얼마나 만용이었는가를 그제서야 깨달았다.

  “널 겁이 나서나 실력이 딸려 못 죽이는 걸로 착각하지 마. 아 물론 좀 전에 네놈 친구라는 형사에게서 전화가 왔어. 그것 때문도 아냐. 고작 형사부장 정도 밥줄 끊어놓기야 누워서 죽… 아니 앉아서 식은 죽 먹기지. 이유는 단 한 가지, 마누라를 찾아 둘을 함께 멋지게 죽일 방법을 생각할 때까지는 살려둘 거야. 이제 난 다 포기했어. 무슨 말뜻인지 알아? 찢긴 자존심 치료할 일만 남았어. 이 개새끼야!”

  다시 날아든 주먹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다음 호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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