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한 바퀴 길에 둘산댁 할머니가 길가에 서 있어 인사하려는데 갑자기 논을 내려다보며 소리치는 게 아닌가. 저도 모르게 거기로 고개 돌렸지만 뭘 보고 그러는지 몰라 여쭤보려는데 이번엔 할머니가 갑자기 작은 돌을 주워 들더니 논을 향해 던졌다.
순간 '호로록 호로록' 날갯짓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십 마리 아니 수백 마리 참새 떼가 동시에 날아올랐다. 까마귀나 갈매기가 떼로 날아오름을 ‘훨! 훨! 훨!’이란 제법 큰 의성어로 표현함에 비해선 확실히 좀 약하다. 해도 수백 마리가 되니 만만치 않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이놈의 소상들' 하고 욕한 주인공이 바로 벼 익어갈 무렵 찾아와 나락 까먹는 참새 떼다. 소상은 '소생'의 경상도 사투리다. 보통 나이 어린 사람이 저보다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낮출 때 쓰지만, 못된 짓 하는 아이나 동물을 가리킬 때도 쓴다.
"조, 소상들! 올매나... 올매나 마니 처묵어샀으면 저 살 바라. 선상님요, 까마구보다 더 통통하지예?"
내가 받았다.
"정말 그렇군요. 살이 포동포동 쪄서 몇 마리만 잡아 구워도 술안주로 그저 그만이겠군요."
말을 하고 다시 논으로 날아드는 녀석들을 보니 기분 상 그런지 몰라도 이른 봄에 볼 때보다 덩치가 훨씬 커졌다. 그래서 겨울참새와 가을참새는 다르다던가. 확실히 겨울 말라붙은 덤불 속에 옹기종기 모여 웅크린 참새와는 크기부터 차이가 난다.
“조노므 소상들, 우째 오나락만 찾아 다 까묵는지, 오나락만 다 까묵어...”
오나락은 올벼(일찍 익는 벼)의 경상도 사투리다. 똑같은 시기에 익는 품종만 다 심지 않고 올벼도 함께 심었는데 올벼만 찾아 까먹는다는 말이다. 하기야 참새에게 나락이 가장 고급 음식인데 올벼와 늦벼를 구별 못하면 먹을 자격 없다고 해야 할 터.
그러고 보니 길을 걷다 온 마을 가득 펼쳐진 논 가운데서도 참새가 떼 지어 머무는 논은 따로 있었다. 오직 거기(올벼 심은 논)만 머무르는 까닭을 그제사 알게 되었다. 녀석들이 방앗간 찾아도 아무 방앗간 아닌 먹이 있는 곳만 찾는다는 얘기 아닌가.
하기야 참새뿐이 아니다. 고구마 심었다 멧돼지에게 피해 입은 농가 주인에게 들으니 그놈들은 밤고구마와 호박고구마를 신통하게 구별한다나. 한 줄은 밤고구마 다른 한 줄은 호박고구마를 심으면, 밤고구마 줄은 건드리지 않고 오직 호박고구마 줄만 작살낸단다.
한 바퀴를 완수하려 되돌아오는데 오나락 익는 논 가까이 이르니 참새 떼가 날아오른다. 이른 봄엔 소리도 작고 그려내는 원도 작아 귀여웠는데 이젠 아니다. 둘산댁 할머니 말씀처럼 저 정도면 귀여움을 넘어 징글징글하다. 참새가 징글징글하다니? 이런 표현이 맞는가 싶지만.
참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15,000년 전 볍씨가 1998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에서 출토되었다는 기사를 읽었으니까. 이러니 벼와 관련된 우리말이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다. 간단히 떠올려도 ‘모’ ‘이삭’ ‘벼’ ‘쌀’ ‘나락’이 주욱 나온다.
시작은 ‘모’부터다. 농사짓지 않은 사람도 ‘모내기’는 들어봤을 터. 먼저 '볍씨'를 뿌려 '모'를 내는데, 모는 벼의 싹이다. 이 모가 자라 '벼'가 되는데 모는 줄기 상태로 있을 때만 쓰고, 벼는 흔히 ‘벼농사’ 할 때 대표가 되는 말로 다 쓰인다.
벼가 자라 이삭(벼의 머리 부분)이 패면 '나락'이 되고, 방아를 찧으면 '쌀'이 된다. (패다 : 벼 익을 때 쓰는 말) 그러니까 ‘이삭 심기’ ‘모 베기’ ‘나락농사’란 말을 써선 안 되고, 대신 ‘모심기’ ‘나락(벼) 베기’ ‘벼농사’라 해야 한다.
이제 쌀을 두고 들먹이면 좀 어려운 문법이 뒤따른다. ‘좁쌀’ ‘찹쌀’ ‘햅쌀’ ‘멥쌀’은 다 들어봤으리라. 왜 ‘조쌀’ ‘햇쌀’ ‘찰쌀’ ‘메쌀’이 아니고, 좁쌀이요 햅쌀이요 찹쌀이요 멥쌀인가를 알려면 어려운 문법을 파헤쳐야 하니 생략한다.
다만 현재 쌀의 고어는 ‘쌀’이 아니라 ‘ᄡᆞㄹ’이었다. 이 ‘ᄡᆞㄹ’의 ‘ㅂ’이 받침 없는 말과 이어질 때 받침에 달라붙는다. 예를 들어 ‘조 + 쌀’이라면 조쌀이 되어야 하지만, ‘조 + ᄡᆞㄹ’이니 좁쌀이 되는 것처럼.
(SNS에선 쌀의 고어 표기가 부서져 아래 자료를 첨부하니 참고하시길)
벼와 관련된 우리말이 많다면 그 벼를 호시탐탐 노리는 참새 역시 우리 속담에 많이 언급된다. 들으면 아는 속담은 생략하고 잘 안 쓰지만 한 번씩 써먹을 수 있는 속담도 꽤 되니 생활 속에 활용하기 바라는 의미에서 나열해 본다.
‘걷는 참새를 보면 그해에 대과에 급제한다. (희귀한 일을 보았으니 좋은 일도 따라온다는 뜻)’
‘참새 앞정강이를 긁어먹는다(참새 덩치 자체가 작은데 그 앞정강이를 긁어먹으니 무척 인색한 사람을 가리킴)’
‘참새는 굴레 씌울 수 없지만 호랑이는 길들일 수 있다. (뚝심으로 지혜를 이길 수는 없지만 지혜로는 뚝심을 이길 수 있음을 뜻함)’
‘참새 백 마리면 호랑이 눈깔도 빼 간다. (보잘것없는 존재라도 힘을 합치면 못할 일이 없음을 뜻함)
(허수아비도 이 정도면 작품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달내마을에, 아니 우리나라 전 시골 논에 참새와 방앗간 주인의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다. 아무리 허수아비가 그럴듯해도 누가 이길지는 뻔하다. 평생 가해자 참새가 평생 피해자인 농부를 조금만 괴롭혔으면 하는 마음에 ‘참새왕’을 찾아가 이렇게 담판 짓고 싶다.
“얄마들아! 너거들 양식으로 해마다 적당량의 쌀을 내놓을 테니, 논에 좀 그만 들락날락해라. 할매들이 너거들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 안 카나. 지발 말 좀 듣거래이!”
*. 둘째 사진은 [전라일보](2015.08.19)에서, 셋째 사진은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홈](2016.10.11)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