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두줄시'(제9편)
가을에는 감만 발갛게 익어가는 게 아니다
매달린 추억과 함께 내 마음도 빠알갛게 익어간다.
<함께 나누기>
가을 하면 빛깔이 참 다양합니다.
우선 하늘빛을 볼까요? 우리나라 가을하늘빛을 ‘비취빛’, ‘옥빛’, ‘쪽빛’, ‘청잣빛’이라 하여 비유가 찰집니다. 애국가에도 나오지요.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푸른 가을하늘이 탁 트여 넓게 펼쳐 있기에 만들어진 노랫말입니다.
바다도 사시사철 빛깔이 다 다릅니다. 그 가운데 가을빛은 모랫빛과 연결시켜 생각해야 합니다. 여름바다에선 백사장은 발자국에 치여 빛깔을 잃어버리나, 사람이 빠져나간 가을바다는 푸른빛과 연노랑이 조화를 이룹니다.
가을꽃 하면 꽃무릇, 과꽃, 꽈리꽃, 천일홍 등이 있지만 역시 대표꽃은 ‘코스모스’와 ‘국화’이지요. 특히 가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린다 하여 ‘살살이꽃’이란 별명 붙은 코스모스와, ‘쑥부쟁이 구절초 산국 벌개미취 감국’을 다 포함한 국화가 꾸미는 현란한 빛의 향연.
단풍이 빚어내는 빛깔도 참 곱지요. 붉을 ‘丹’을 붙게 만든 단풍나무의 빨간빛, 노란 단풍의 대명사 은행잎. 이 둘이 단풍의 주연이라면 조연으로 마침맞은 게 바로 갈참 졸참 굴참 같은 참나무가 만들어내는 황갈색.
하늘ㆍ 바다ㆍ 꽃ㆍ 단풍, 이들 다 꺼내놔도 시골 가을빛의 으뜸은 잘 익은 감빛입니다. 특히 감나무에 달려 잘 익어가는 홍시의 발간 빛이야말로 무엇에 비기랴. 홍시 빛깔이 유난히 돋보임은 입체적이라는 점, 높은 나뭇가지에 달려 있다는 점, 입맛을 다시게 만든다는 점 때문입니다.
우리 집 감나무는 이제 홍시를 달지 못합니다. 감꽃까지 피는데, 이어서 감이 달리긴 하는데 이내 떨어지기에. 몇 년 전만 해도 홍시 되기 직전에 따 곶감을 만들었습니다. 최소 열 접 (1,000개). 그러면 일가친척에게 보내고도 서너 접 남아 그대로 먹고 또 수정과로 만들었건만.
곶감이 숙성돼 갈 무렵 말랑말랑할 때쯤이면 나들며 하나씩 빼먹습니다. 완전 숙성될 때까지 기다려야지 하다가 또 빼먹고. 그러니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 하는 속담이 만들어졌겠죠. 애써 알뜰히 모아 둔 재산을 조금씩 헐어 써 없앨 때 쓰는 말인데 딱 들어맞습니다.
풋감이 홍시가 될 무렵이면 한 소녀가 생각납니다. 열두 살 때까지 팔칸집 - 여덟 가구가 모여 사는 주택 -에 살았습니다. 한 살 어린 주인집 딸이 저를 무척 따랐습니다. 솔직히 저도 좋아했고요. 봄이면 풋보리 몰래 뜯어다 구워 먹고(요즘 ‘보리그스름 놀이’라 함), 여름이면 깨금(표준어로 ‘개암’인데 영어로 '헤이즐럿'이라 부르니 일종의 견과류) 따다가 함께 먹었습니다.
특히 감나무는 감꽃 달릴 때부터 군것질거리 제공합니다. 감꽃은 약간 달착지근하여 먹을 만합니다. 지금 단 걸 좋아하는 애들이야 거들떠보지도 않겠지만. 풋감이라 하여 그냥 두지 않습니다. 풋감은 그대로는 먹지 못할 만큼 떫은데, 이걸 소금물에 담아두면 먹을 만합니다. (이를 침시[沈柿 : 물에 담글 ‘침’ 감 ‘시’], 혹은 침감이라 함)
허나 감의 최고봉은 뭐니 뭐니 해도 홍시입니다. 홍시는 빛깔로 유혹해서 달달한 맛으로 입안을 마취시킵니다.
‘떡을 먹을 때 곁들이면 가장 좋은 부재료는?’ 이런 질문이 나오면 당연히 ‘꿀’ 하고 답하겠죠. 그래서 '꿀떡꿀떡'이 만들어졌는가? 술꾼은 떡 먹을 때 꿀보다 술을 앞세웁니다. 이를 의태어로 만들면 ‘술떡술떡’이 되니 그럴듯하지요. (실제 어느 술집에선 떡을 안주로 내놓는다고 합니다)
떡과 함께 할 부재료로 꿀(조청 포함)과 술을 택한다면 저는 그보다 더 위에 홍시를 둡니다. 홍시와 떡의 오묘한 조화. 안 먹어본 사람은 말을 하지 마시라. 특히 익어 터질 듯한 홍시를 접시에 으깬 뒤 떡을 찍어먹으면 열이 먹다 아홉이 죽어도 모릅니다.
팔칸집 (주인) 소녀는 떡을 갖고 오고 나는 홍시를 따오고. 그렇게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주인집에선 무시로 먹는 떡이었으나 우리 집에선 설 추석 아니면 못 먹는 떡을 홍시에 찍어먹었으니 얼마나 맛있었으리오.
한참 맛있게 먹던 중 소녀 쪽으로 도마뱀이 기어갔던 모양입니다. 놀라 일어서다가 홍시 담긴 그릇을 엎었고 죽이 된 홍시는 그만 소녀의 하얀 치마를 더럽히고 말았으니. 한 번 물들면 절대 지워지지 않는 감물.
그날 저는 도망쳤습니다, 비겁하게. 분명 소녀가 떡 갖고 온 게 들통나면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야단맞을 게고. 그게 울엄마에게 전해질 터, 그러면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울아부지. 그러니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갈 수 없고 늦가을의 찬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집 흙담 아래 추위와 두려움으로 쭈그리고 앉았는데 소녀가 찾아왔습니다. 얼굴이 발그레 상기돼 있는 걸로 보아 이곳저곳 찾아다닌 듯. 자기 엄마에게 잘 말해 아무 일 안 나게 만들었으니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래, 가을에는 감만 바알갛게 익어가는 게 아니라, 매달린 감의 개수만큼 추억도 불러내주기에 제 마음도 빠알갛게 익어갑니다.
*. 첫째는 시 만들려고 그린 그림인데 참 유치하고, 셋째 사진은 우리 집 테라스에 숙성돼 가는 곶감이요, 다섯째 사진은 으깨 홍시요, 여섯째는 흙담에 쭈그리고 앉은 소년인데 챗GPT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