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일흔에 풀어놓은 소소한 이야기(제78편)
제가 직접 겪은 일화와 남에게 들은 사례를 섞어 만들었습니다.
<하나>
8년 전쯤 퇴직하고 시간이 남으면서 뭔가 보람 있고 시간 보내기 좋고 적은 돈이나마 들어오는 일자리를 찾으려 했다. 시청 홈을 뒤적이니 내게 딱 맞는(?) 일자리가 눈에 띄었다. 시에서 운영하는 ‘도서관 사서 보조’. 전문 사서 일이 아니라 보조 일이니 힘들지 않을 터.
지원을 했다. 첫 번째 낙방, 두 번째 낙방까지 그럴 수 있지 하다가 세 번째마저 낙방하면서 의구심이 들었다. 아니 이 작은 도시에 자격증 가진 사람이 이리도 많단 말인가. 그리고 도서 업무 경험 있는 사람도?
자격증뿐 아니라 학교에서 주로 도서관 업무 관련 일을 했으니 분명 적격자이건만 나를 떨어뜨리다니... 오기로 네 번째 서류를 넣었고 면접 마치고 나오는데 ‘사서 주무관’이 부르더니 도서관장님께서 나랑 직접 얘기 나누고 싶다고 했다.
주고받은 요지는 다음과 같다.
. 사서 보조 업무는 대출한 사람이 책 갖다 놓으면 제 자리에 끼워놓는 정도의 일이라 굳이 자격증 없어도 도서 업무 경험 없어도 할 수 있다.
. 선생님은 책도 펴내셨고, 자격증도 있으며, 도서 업무 경험도 풍부하니 사서 보조가 아니라 자기가 하는 관장 일도 맡을 능력이 된다.
. 원래 이 일은 생계가 어려우면서 하루 종일 아닌 일정 시간 나와 일할 수 있는 주부에게 맡기는 게 관례였다. 올해도 그러려고 하는데 선생님이 계속 지원했다. 만약 감사 나오면 0순위인 선생님을 안 뽑고 다른 사람 뽑은 까닭을 소명해야 한다.
그날 관장이 부드럽고 예의 바르게 얘기했지만 나는 졸지에 눈치 없이 어려운 사람 일자리 빼앗으려는 나쁜 넘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그곳에선 다음 공고부터 ‘공무원 연금 수혜자는 응시 불가’란 항목이 첨가되어 더 이상 원서 내지 않아도 되었지만.
<둘>
부산 사는 또래의 늙은이에게서 들은 얘기다.
지하철을 탔는데 하도 졸려 참으려 했으나 그만 잠에 떨어지고 말았다. 제법 시간이 지나 눈을 떠 앞을 보았더니 잠이 확 깨더라나. 허연 미끈한 알다리의 미니스커트 입은 아가씨가 바로 앞에 앉아 있어. 얼결에 눈을 돌리려 하는데 목이 칼칼하여 침을 꼴깍 삼켰다. 순간 아가씨와 눈이 마주쳤고 그때 알다리가 내뱉은 말,
"아이, 재수 없어!"
얘기를 듣던 우리는 배꼽이 녹을 정도로 웃음을 터뜨렸고. 한 사람이 이어 붙였다,
"그 아가씨 참 기분 나빴겠다. 늙은 영감탱이가 풋풋한 자기 보고 침을 꼴깍 삼켰으니."
한 번 더 터진 폭소에 그가 손을 내저으며,
"아니 그 아가씨 때문에 침 삼킨 게 아니라 하도 달게 잔 뒤 절로 나온 침 꼴깍이었당께."
그 영감탱이가 눈치 없는 건지, 침 꼴깍이 눈치 없는 건지...
<셋>
언양에 머물면서 나는 남천내를 한 바퀴 돌며 운동하고, 아내는 가까운 체육관에 가 요가와 수영을 한다. 거기서 얻은 주요 정보 하나. 점심때가 되면 체육관 바로 아래 늙은이를 위한 싼값의 급식소가 있다 했다. 말하자면 경로우대 급식소.
가끔 아내 없이 혼자 점심 먹어야 할 때가 종종이라 듣고선 손뼉을 딱 쳤다. 고작 1000원이면 점심 해결할 수 있다는데 싫어할 늙은이가 있을까. 아내가 출타하여 점심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날이 왔고, 급식소로 가 식판을 들고 섰다.
그때 식탁 정리하고, 질서도 유지할 겸 줄 선 사람 사이로 왔다 갔다 하는 한 여성을 보았다. 그냥 일 도우는 사람인 줄 알고 무심코 보는데,
“아니, 교수님! 여기 웬일이세요?”
교수님 소릴 들을 이유야 있지만 설마 나를 두고 하는 말이라곤 생각 안 했다. 헌데 그녀가 다가와 내 손을 잡더니,
“아이구 교수님, 참 많이 늙으셨다.” 하며 안쓰러워하지 않는가.
아주 오래전 모 대학 야간부 ‘사회복지학과’에서 [언어와 문학]을 8학기 동안 강의한 적이 있는데 그때 수업받은 학생이라 했다. 기억력이 짧아 머릿속에 들어 있진 않지만 그녀는 날 한눈에 알아봤다나. 원래 선생은 제자를 모르나 제자는 선생을 기억하는 일이 잦다.
문제는 그 뒤였다. 사람들 수군거림. 얼마나 창피한지. 아 그때 교수님이란 호칭 대신 선생님이라 불렀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차라리 그냥 모른 체하고 지나쳤더라면... 그날 이후 거기로 가지 않는다. 돈 아깝지만 아파트 바로 앞 1만 원짜리 '돌솥비빔밥' 먹었으면 먹었지.
굳이 1000원짜리 점심을 먹으러 간 내가 눈치 없는 건가, 아니면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에 ‘교수님!’ 하고 외친 그녀가 눈치 없는 건가.
<넷>
이제는 댄스스포츠가 누구나 즐길 스포츠가 되었다. 내가 이 스포츠를 계속했더라면 아마도 강사가 되고도 남았을 게다. 그러니까 아주아주 오래전 일이다. 같은 학교 교사이자 친구가 홀로 되면서 매우 괴로워했다. 날마다 술을 마셨으니.
술 취하면 새벽이든 언제든 전화를 했다. 그러면 달려갔고. 도저히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싶어 슬슬 꼬시기 시작했다. 뭘 하고 싶으냐고. 죽고 싶은 마음뿐이라나. 그래도 뭘 하고 싶으냐 하니까 느닷없이 댄스스포츠(당시엔 아마도 ‘스포츠댄스’였을 듯)를 하고 싶다나.
그렇게 우리 둘은 댄스스포츠계 아주 초창기 개척자가 되었고. 만약 계속했더라면 '춤 선생'은 몰라도 '춤 강사'는 되지 않았을까. 이런 얘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해주자 내 말에 솔깃하며 실천한 사람 얘기를 한 번 풀어본다.
그가 처음 댄스스포츠 수업에 들어갔을 때 속으로 환호를 질렀단다. 여자가 남자보다 더 많고, 게다가 자기보다 훨씬 젊은 여인들이라나. 댄스스포츠는 남녀가 한 쌍이 되어 춰야 한다. 그러니 더욱 황감해했고. 그렇지 않은가, 젊은 여인과 짝이 되어 착 달라붙어 춤을 추다니.
그렇게 신나고 들뜬 기쁨의 나날은 전개되었고 세상은 온통 해바라기 꽃밭처럼 황홀경이 펼쳐졌단다. 이 수업을 왜 이렇게 늦게 받았는지 오히려 한탄하던 어느 날, 로커에 옷을 넣고 나오다 저 벽 너머에서 여자 로커에서 들려오는 소릴 들었다.
“아 나 미쳐. 백상아리 그 사람과 또 파트너 됐어.”
백상아리? 그런 별명을 가진 남자가 있나? 이리 생각하는데,
“냄새가 나서 미치겠어. 향수를 어디 그따위 싸구려 향수를 뿌리고 와!”
그래도 그때까진 자기를 가리키는 말인 줄 몰랐는데,
“아이구 영감탱이, 가장 늙다리가 백바지에 백구두라니. 아 나 미쳐!”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가장 늙다리였고, 그런 차림은 자기밖에 없었으니. 그는 졸지에 눈치 없는 영감탱이가 되고 말았다.
<다섯>
시골 주택에 살다 보니 국경일이나 주요 명절이 오면 태극기를 단다. 문제는 태극기를 단 뒤 깜빡 잊고 걷지 않아 며칠이 지나갈 때가 있다. 물론 10월 1일(국군의 날)부터 10월 9일(한글날)까지야 괜찮다. 아니 오히려 나라에서 계속 달아라고 권장까지 하지 않는가.
어느 해 여름이었다. 8월 15일 광복절에 태극기를 달았다. 저녁에 그냥 걷었으면 되련만 잊어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어디 갔다 온다고 나가선 이틀 더 있다 돌아왔다. 그러니 태극기를 거둬야 할 날을 나흘이나 더 넘긴 셈이다.
그날 밭에서 일하는데 지나가는 사람들 얘기 소리가 들려왔다. 재잘거리는 소리와 또각또각 구두 소리도 들리는 걸로 보아 젊은 여인들이 지나가는 듯. 그래도 일하기 바빠 계속하는데 주고받는 말소리가 커지며 일하는 밭에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한 여인이,
“어머 오늘 무슨 날이야? 태극기를 다는 날이야?”
“아니 8월 19일은 아무 날도 아닌데...”
그 뒤를 이은 여인의 말이 귀에 콱 박혔다.
“이 집주인 아저씨, 태극기 부대인가 봐.”
‘태극기 부대?’
아니 경멸하여 마지않는 그 무리에 나를 포함시키다니. 단지 며칠 태극기 거두지 않아 놔뒀을 뿐인데. 내려가 해명하려고 삽을 놓고 가니 저만큼 멀어져 갔다. 나중에 돌아올 때 불러 세워 해명해야지 했는데 그녀들은 돌아오지 않고 아랫길로 간 모양이다.
그 아가씨들은 앞으로 자기네끼리 모이면 우리 집 얘기를 하면서 거기 산골에 가니 주인 영감탱이가 태극기 부대원이더라는 말을 하고 있으리라. 아침에 태극기를 달았으면 저녁에 거둬야 한다는 이치를 잊어버렸으니 나는 졸지에 좀 모자란 영감탱이가 되고 말았다.
나이 먹으면 눈은 어두워지더라도 눈치 하나만은 밝아져야 하는데, 요즘 들어 점점 무뎌져가니 조금 슬프다. 젊은이들이 쓰는 말대로 '낄낄빠빠'라고,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 했는데, 눈치 없이 아무 데나 끼어드는 영감탱이가 되다니...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글의 사례는 극단적인 경우에 해당함을 다 아시죠. 급식소 식사 즐기시는 분들, '~~ 보조' 일 하시는 분들, 젊은 여인들이 많이 오는 모임에 나가시는 분들, 태극기를 오래 다시는 분들. 염려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