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6편 : 심보선 시인의 '청춘'
@. 오늘은 심보선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청춘
심보선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 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 뿐이라는 청춘이라는
- [슬픔이 없는 십오 초](2008년)
*. 위악(僞惡) : 본심과는 다르게 일부러 자신을 남에게 악(惡)하게 보이도록 드러내는 태도
#. 심보선 시인(1970년생) : 서울 출신으로 대학 재학 중인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이 시인에게 붙은 별명은 ‘귀공자 시인’입니다. 시 잘 쓰고 멋진 외모의 젊은 시인. 사회학을 하는 ‘좌뇌’와 시를 쓰는 ‘우뇌’가 공존한다는 말을 들으며, 현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전임교수
<함께 나누기>
시인이 쓴 작년 배달한 「나를 환멸로 이끄는 것들」이란 시를 기억하시는 분 계시는지요. 혹 궁금하시면 밴드나 카톡에서 제목 복사해 찾으면 됩니다. 거기서 '환멸로 이끄는 요소'를 죽 나열했는데, 오늘 시도 비슷합니다. 즉 '청춘이란 ~~ 때'라는 형태로 죽 나열한.
읽어보시면 이해가 돼 고개를 끄덕일 항목도 보이고, 이해가 안 돼 고개를 갸우뚱할 부분도 보일 터. 모두 열한 개의 항목이 우리에게 생각거릴 줍니다. 때론 고개 끄덕이며 때론 고개 갸우뚱하며.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시로 들어갑니다.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어떤 소설에선가 주인공이 곱상하게 생긴 데다 체구도 작아 또래에게 늘 괴롭힘 당하게 되자 절권도(배우인 이소룡이 창시한 무술)를 배우러 다닙니다. 어느 정도 익히자 허리춤에 쌍절곤 소지하고, 얼굴에다 흉터도 새기고, 말할 때마다 침을 ‘퇘!’ ‘퇘!’ 뱉으며 욕을 내뱉습니다.
그 뒤 또래들은 주인공을 건드리지 않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게 습관이 되면서 성격도 거칠어졌다는 형태로 전개되는 소설. 우리는 가끔 본심과는 달리 일부러 자신을 악인으로 보이도록 드러내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특히 청춘 시절에.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앞 시행과 비슷하지요. 그녀에게 사내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산발을 하고 거칠게 걸어갑니다. 사내에겐 마초적(macho : 짐승의 수컷, 사내다움을 과시하려는 자세)인 모습을 보이려는 본능을 가졌다고 하지요. 그녀의 시선을 끌기 위해.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어릴 때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황제였습니다. 당신의 말이 곧 법이고 진리였습니다. 어머니는 가장 가련한 희생양이었지요. 그렇게 황제를 군림하던 어느 날, 그날도 아버지가 어머니께 손찌검하려는 찰나 제가 아버지 손을 잡았지요, 얼떨결에.
잡고 나서야 ‘아차!’ 했지만 엎질러진 물. 혹시 모를 주먹을 내밀지 못하게 하려고 더욱 힘을 줬습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저는 그만 놓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우리 집에 황제는 사라졌습니다.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무언가 부조리한 일을 겪거나 다른 이들에게 무시당했을 때 억울함과 분함으로 잠이 오지 않다가 가까스로 잠들면 꿈에 누군가 나타나지요. 더욱 비참해질 때도 있지만 어떤 땐 정의의 사자가 나타나 나를 대신해 복수해 주는 꿈도 꾸게 되고.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이 시에서 가장 밑줄 많이 긋는 부분이 이 시행이라 합니다. 특히 사랑의 아픔을 한 번이라도 겪어본 분이라면. 아무리 몸과 마음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더라도 언젠가 올 배신의 아픔을 견뎌야 함을 상기시키는 뜻으로 새깁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한때 베스트셀러가 되었지요. 거기에 답글 가운데 ‘왜 청춘은 늘 아파야 합니까’ 하는 반발도 나왔지요. 아무리 ‘청춘 시절엔 아픔을 겪어야 성숙해진다’라고 하더라도 사실 아프지 않고 청춘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게 더 좋겠지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죽어버리고 싶다.’ 마치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단 말과 같은 '역설적 표현'이군요. 청춘 시절에 한 번쯤 죽음을 생각해 본다는 글을 읽은 적 있습니다. 조그만 일에도 감정의 요동이 심하단 뜻으로 읽습니다.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 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사실 다른 시절보다 청춘 시절에 많은 걸 가지고 많은 걸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젊은이가 대부분이지요. 그 시간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앞만 보며 질주하기에, ‘그때’가 푸르른 봄이고 ‘그때’가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시절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지납니다.
몇몇 행은 해설을 생략했습니다. 한 행 한 행 다 일일이 해설하고 싶은데 지면상 그러지 못했습니다. 다만 제가 설명 붙인 부분 말고 다른 생략한 부분에 대한 해설을 덧붙여 주시면 제게도 큰 도움이 됩니다.
*. 뒷사진은 넷플릭스에 방영된 '청춘' 스틸컷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