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1편 : 최정란 시인의 '쓴맛이 사는 맛'
@. 오늘은 최정란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쓴맛이 사는 맛
최정란
통이 비었다 쓰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이따금 큰 숟갈로 썼구나
시간이 없는데 식탁을 차려야 할 때
급한 불을 끄듯 설탕을 더한다
그때마다 요리를 망친다
손쉬운 달콤함에 기댄 대가다
마음이 허전하고 다급할 때
각설탕 껍질을 벗기듯
손쉬운 위로의 말을 찾는다
내가 나를 망치는 줄도 모르고
임시방편의 달콤함에 귀가 썩는 줄도 모르고
생의 시간을 털어가는 달콤한 약속들은
내 안이 텅 비어
무언가 기댈 것이 필요할 때
정확히 도착한다
내 안에 달콤함을 삼키는 블랙홀이 있다
주의하지 않으면
언젠가 생을 통째로 삼킬 것이다.
- [사슴목발 애인](2016년)
#. 최정란 시인(1961년생) : 경북 상주 출신으로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현재 부산에 살며 시 쓰고 있는데 발랄하고 신선한 언어 감각에, 때로 비 같은 비애의 마디를 꺾어 시의 화병에 꽂는 시인이란 평을 들음.
(참고로 충북 영동 출신인 최정란 시조시인은 동명이인임)
<함께 나누기>
자료사진에서 보이는 ‘쓴맛이 사는 맛’이란 글귀는 경남 양산시 효암고교 안 큰 돌에 새겨져 있는 글입니다. 허니까 시인은 이 학교에 들렀을 터. 다만 이 글의 내력을 알고 썼는지, 단지 '쓴맛이 사는 맛’이란 그 글귀에 끌려 썼는지 분명하진 않습니다.
이 학교 (전) 재단 이사장은 ‘채현국’ 선생으로 존경받을 일을 많이 하신 분이랍니다. [창작과 비평]의 운영비가 바닥날 때마다 뒤를 봐준 후원자였으며, 셋방살이하는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사준 파격적인 분이셨습니다.
또 유신 시절 수배자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여러 민주화운동단체에 자금을 댄 익명의 운동가였답니다. 적어도 시인이 이 정도의 내력은 알고 시를 썼으리라 여깁니다. 다만 시에선 그분을 완전 배제한 체 자기 소리로 바꾸었고.
'쓴맛이 사는 맛'이란 우리 살아가는 데 쓴맛이 꼭 필요하단 뜻이겠지요. 달리 말하면 단맛을 멀리하라는. 요즘 혈당이 떨어지지 않아 그 좋아하던 단맛을 멀리하며 살다 보니 맛있다는 말을 잊고 삽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통이 비었다 쓰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 이따금 큰 숟갈로 썼구나"
반찬 만들려 했더니 설탕통이 비었습니다. 그동안 별로 쓰지 않아 남았으려니 했는데 사실은 자주 큰 숟갈로 퍼넣었던 게 분명합니다. 시간이 없어 식탁을 차려야 할 때는 급한 불 끄듯 설탕을 더합니다. 일단 달달하면 먹을 만하니까요.
“마음이 허전하고 다급할 때 / 각설탕 껍질을 벗기듯 / 손쉬운 위로의 말을 찾는다”
마음이 허전하고 다급할 때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스스로를 달콤하게 위로하는 말이랍니다. 실수했을 때나 잘못 저지를 때마다 ‘나도 사람이니 그럴 수 있지, 뭐.’ 하며 반성하기보다 어물쩍 넘기려 합니다.
“내가 나를 망치는 줄도 모르고 / 임시방편의 달콤함에 귀가 썩는 줄도 모르고”
이제 ‘쓴맛이 사는 맛’의 뜻이 음식 쓴맛만을 얘기함이 아니라 삶의 쓴맛으로 확장됨을 봅니다. 양약고구(良藥苦口 :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몸에는 이롭다)란 말이 있지요. 글자 그대로 읽어도 됩니다.
비유적으로 읽으면 내게 들어오는 말 가운데 나를 칭찬하는 말은 귀에 잘 들어오는데 내게 싫은 말은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실 ‘칭찬하는 말보다 나를 비판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라는 가르침이 있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러지 못합니다.
“생의 시간을 털어가는 달콤한 약속들은 / 내 안이 텅 비어 / 무언가 기댈 것이 필요할 때 / 정확히 도착한다”
신기하게도 내가 흔들릴 때 달콤한 유혹이 찾아옵니다. 뭔가 힘들고 지쳐갈 때를 지켜보고 있기나 하듯 그때 딱 맞춰 찾아옵니다. 그러면 나는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달려듭니다. 왜냐면 워낙 달콤하여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어서.
“내 안에 달콤함을 삼키는 블랙홀이 있다”
참 멋진 시구입니다. 얼른 책갈피 속에 담았습니다. 다 아는 쉬운 말로 이런 표현을 만들어내는 능력에서 시인의 역량이 엿보이지요. 그렇지요, 달콤함에 무턱대고 빠지면 언젠가는 내 삶이 달콤함의 블랙홀에 빠져 삶이 통째로 망가질지 모릅니다.
누구나 세상을 살다 보면 숱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쓰다고 뱉어버리고 달콤함만 찾는다면 안 되겠지요. 깨달은 분의 말씀처럼, 시 제목처럼 ‘쓴맛이 사는 맛’임을 깨닫는다면 그리하여 그것도 우리 삶의 일부임을 인정한다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