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2편 : 김환식 시인의 '초장이 싱겁다'
@. 오늘은 김환식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초장이 싱겁다
김환식
살다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속을 뒤집어 보여줄 수도 없고
깨물린 입술이 또 입술을 깨물어야 한다
사람의 속도 빙어처럼 투명할 수 있다면
답답할 땐 속을 훤히 보여주면 좋을 것이다
빙어도 속 터지는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때마다 속을 뒤집어 보이자니 답답했을 것이고
그래서, 아예 속을 훤히 보여주며 살려고
날마다 투명하게 진화했을 것이다
그런 빙어가 술상에 안주로 나와 앉았다
몸부림을 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제법 단정하고 편안한 모습이다
나도 가끔은 그럴 때가 있다
뒤집은 속을 툭툭 털어 보이고 싶지만
그렇게 보여 줄 대안이 없는 것이다
빙어가 부럽다
통째로 빙어 한 마리를 입안에 넣는다
죽은 줄만 알았던 놈이 꿈틀거린다
초장이 싱겁다
- [시와시와](2013년 여름호)
#. 김환식 시인(1958년생) : 경북 영천 출신으로 1995년 [시와반시]로 등단. 현재 자동차 부품회사인 '한중NCS' CEO로 있는데, 시인 가운데 보기 드문 경영자로 시집도 무려 9권이나 펴냄.
동명이인으로 시조시인인 김환식 씨도 있으니 혼동 마시길.
<함께 나누기>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2002년 겨울 문학기행, 그때 전북 임실군 옥정댐 바로 아래 마암분교에 근무하시던 김용택 시인을 찾아뵙는 시간을 가졌지요.
그 기행에서 잊을 수 없는 그림 둘이 머릿속에 낙인찍혀 지금도 심심하면 끄집어내 오물거립니다. 하나는 ‘빙어’와 다른 하나는 ‘빙화’ 그날 저녁 옥정호 주변에 숙소를 잡았는데 마침 그 근처 식당에서 빙어회를 판다 하여 갔습니다. 빙어가 노니는(?) 대접 한 사발과 옆에 초장 한 접시. 그걸 먹어야 함을 알게 된 여선생님들은 기겁하였고.
저는 그전에 빙어를 몇 번 먹었지만 그렇게 작은놈들은 처음이었습니다. 잔멸치만 한 녀석들이 몸은 얼마나 투명한지. 처음엔 젓가락으로 한 마리 두 마리 건져 먹다 성에 안 차 초장을 풀어 섞은 사발을 그냥 들이마셨습니다. 저를 보는 눈이 확 달라졌습니다. 엽기적인 인물로.
다음날 일찍 잠 깨 옥정댐 주변을 돌아보러 나왔습니다. 해뜨기 전이라 잘 안 보이는 가운데서도 나뭇가지에 뭔가 반짝거리는 게 보였습니다. 가까이 갔더니 세상에! 나뭇가지에 맺힌 꽃은 빙화(氷花 : 얼음꽃) 아니겠습니까. 호숫물이 증발하면서 가지에 얼음 맺혀 꽃이 피어났습니다.
해가 떠오르며 햇빛을 받아 얼마나 영롱하게 반짝거리는지. 지금까지도 그런 황홀한 반짝거림은 본 적 없습니다. 게다가 해가 솟아오르며 하나둘 스러져 물방울로 떨어질 때 그 모습은 또 얼마나 애달픈지. 다시 한번 겨울 그곳에 가 그 느낌 누리고 싶습니다.
오늘 시에 나오는 빙어는 제가 보고 맛본 빙어와 비슷합니다, 투명하다는 점에서. 이 시를 관통하는 시행은 맨 앞에 나옵니다.
“살다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 속을 뒤집어 보여줄 수도 없고”
살다 보면 답답할 때가 많지요. 특히 나만 아는 진실이 있는데 그 진실을 털어놓아야 하지만 터뜨리는 순간 엄청난 폭발이 예상된다면. 또 남이 나를 몰라주고 무시하거나, 진심을 왜곡하여 받아들일 때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습니다.
“깨물린 입술이 또 입술을 깨물어야 한다”
남이 나를 몰라줘도 나를 무시해도 속이야 끓지만 그래 ‘너거들이 뭘 알겠노!’ 하며 그냥 지나치면 됩니다. 하지만 내가 하지 않은 일로 누명을 쓰게 되었는데 마땅히 보여줄 증거도 없다면 그럴 때는 정말 속 터집니다.
“사람의 속도 빙어처럼 투명할 수 있다면 / 답답할 땐 속을 훤히 보여주면 좋을 것이다”
사실 빙어 가운데 큰 녀석들은 속이 불투명하지만 작을수록 그 속이 투명합니다. 화자는 그런 빙어회를 먹으면서 문득 느꼈습니다. 우리 인간의 속도 빙어처럼 투명하여 굳이 내 속을 뒤집어 보여줄 필요 없이 남이 다 보고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도 가끔은 그럴 때가 있다 / 뒤집은 속을 툭툭 털어 보이고 싶지만 / 그렇게 보여 줄 대안이 없는 것이다”
살면서 속을 빙어처럼 투명하게 보여주고 싶은데 상대가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특히 마땅한 증거가 없을 땐. 아마도 이런 경험 한두 번은 다 해봤을 듯. 털어놓고 싶은데 털어놓을 수 없는 사정이 있거나, 털어놓아도 상대가 믿지 않을 때. 그럴 때 자기 속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빙어가 부러울지도.
“초장이 싱겁다”
마지막 시행은 하나의 독립된 연으로 만들었습니다. 위에 쭉 이어진 18행이 마지막 이 행에 와서 결실을 거둡니다. 화룡점정(畵龍點睛). 통째로 빙어 한 마리를 입안에 넣었더니 죽은 줄만 알았던 빙어가 꿈틀거립니다. 살아 있는 녀석을 입에 넣었으니 씹기 전엔 살아 꿈틀함은 당연한 일.
다만 이 시구에서 빙어는 꿈틀하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보여주는데 나는 그러지 못하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즉 하찮은 빙어도 자신의 결백을 온몸으로 저항하면서 '나는 나'임을 증명하는데 인간인 나는 그러지 못합니다. 나는 빙어보다 못합니다.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