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 길고양이와 거리두기
* 길고양이와 거리두기 *
<하나> ‘데면데면’
한때 ‘거리두기’란 말이 유행했다. 코로나19 때 ‘사회적 거리두기’란 이름으로. 지금도 그때의 문구가 더러 보인다.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마스크를 쓰면서 불편함도 생겼지만 편함도 있었다. 늙고 못난 내 얼굴 남에게 노출시키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1월 7일 「길고양이에게 진 빚」이란 제목의 생활글 한 편을 올렸다. 우리 집에 장박(長泊)하는 길고양이 사연을. 그때 부지런히 사료와 물 주었지만 길고양이는 얼굴도 내비치지 않은 채 먹고 사라진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지금은 어떤가? 한 번씩 들를 때마다 보이지 않던 녀석이 사료 들고나오면 바로 뒤 소나무 아래 앉아 나를 보고 있다. 아무래도 내 차 소리를 아는 듯. 아니면 어떻게 우리 집에 줄창 살지도 않는데 딱 내가 오는 시간에 맞춰 나타날까.
그럼 사이가 좋아졌는가? 아니다. 녀석은 테라스 밑 사료통에 사료 넣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반드시 내가 사라져야 먹는다. 먹는 사진을 찍어 보려도 실패다. 휴대폰만 들면 재빨리 어디론가 사라지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면 녀석 모습 담은 ‘인증 사진’ 없는 이유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 둘은 통하는가. 혹 잊어버리고 사료 내놓지 않으면 밤에 테라스에 나타나 소리를 낸다. 그러면 ‘아차!’ 하고 나가 주고. 그러니까 서로 의식은 하면서도 소통하지 않는 사이가 우리 사이다. 그런 사이를 ‘데면데면하다’ 하던가.
<둘>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리도 하지 말라는 뜻의 한자성어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 쓰인다. 이는 통상 사람 사귐에 쓰는 말이다.
나처럼 산골마을에 전원주택 짓고 사는 아주 친한 이에게서 들은 얘기다.
그가 오래전 모임에서 한 아가씨를 알게 되었다. 딸 나이쯤이라 가까울 리 없었는데 어느 날 곁에 와 말을 걸었다. 그림 그리느냐고. 변변찮은 솜씨지만 늘 붓을 잡고 있다 했더니 그때부터 심심하면 곁에 와 말을 걸었다. 자기도 그림 좀 그리는데 발표하진 않았다면서.
먼저 다가온 젊은 여성 아닌가. 기분 나쁘지 않아 몇 번 얘기를 나누었더니 그쪽에서도 자기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그녀 말로 명문대 출신이며 직업을 밝힐 순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한다나. 긴가민가 했지만 그보다 스스럼없이 나이 많은 낯선 이에게도 말 붙이는 그 성격이 좋아 자주 얘기 나눴다.
붙임성이 너무(?) 좋았다 할까. 그 붙임성이 문제다. 어느 날 얘기 중에 집 얘기가 나왔고, 집 사진 보여 달라 하여 보여주었고. 찾아가도 되겠냐기에 그냥 인사말로 오라 했다. 보통 그러지 않는가, 찾아가겠다는 말에 찾아오라고 형식적인 답을 하는 경우가.
바로 다음 날 저녁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ㅇㅇ’라는 곳인데 거긴 자기 집에서 20분쯤 떨어진 곳. 집에 가려니 차가 없어 못 간다고. 말끝에 좀 태우러 올 수 없느냐고. 황당했으리라. 거기 오면 집까진 오는 건 문제 없다는 말은 했던 것 같은데 무작정 찾아오다니. 그것도 저녁땐데 차 없이 산골 들어올 생각 하다니.
그래도 그 정도야... 만약에 그의 아내가 없었더라면 절대 데려오지 않았겠지만 물어보니 괜찮다고 했다. 마침 저녁 식사 때라 그녀랑 셋이 함께 식사를 했고. 얘기하다가 9시쯤 되어 데려다줄 요량으로 일어섰다.
헌데 그녀가 하룻밤 자고 갈 수 없느냐 했고. 무슨 이런 일이... 생각하다 제법 두툼한 가방 보니까 미리 작정한 모양 아닌가.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ㅇㅇㅇ에서 하는 논문 발표회에 가봐야 하는데 꼭 참석해야 한다며 거기까지 태워 달라고 했다. 1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상황은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는데 며칠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역시 ㅇㅇ라면서. 허나 이번엔 그도 아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아내가 외출하여 혼자 지내니 안 되겠다는 핑계를 댔다. 그걸로 완전 끝인 줄 알았는데...
다시 연락이 오고 그는 생애 최초로 여성의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혹 무작정 버스나 택시 타고 집으로 쳐들어오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거기까지 진행은 안 되었고. 나중에 그의 아내에게 야단 들었다. 사람을 제대로 보고 가까이 해야지 아무나 가까이했다고. 불가근불가원 원칙을 어겼다는 책망이리라.
<셋> 아끼면서 주는 사랑
‘K-팝’에 이어 ‘K-드라마’가 세계를 흔들고 있다. 넷플릭스 상위에 오르길 여러 번 하면서 우리나라 드라마의 위력에 우리들조차 깜짝깜짝 놀란다. 참 신기하다. 노래는 몰라도 드라마까지라니. 기억 속 우리나라 드라마는 천편일률인데. 특히 엄마와 아들 사이에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엄마가 아들의 성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 드디어 성공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당연히 여기저기서 혼사가 들어오고. 엄마에게 이미 계획이 있다. 재벌집 딸이나 그에 버금가는 집안이어야 한다는 점. 아들의 선택은 중요하지 않다.
허나 아들이 좋아하는 아가씨는 가난한 집 안의 딸. 여기서 엄마와 아들의 갈등이 시작된다. 엄마에게 거역하느냐 아니면 계속 마마보이로 남느냐. 엄마 의견을 따르자니 마음에 없는 여자와 결혼해야 하고, 아들 마음대로 하자니 엄마가 슬퍼하고. 바야흐로 아들은 '고뇌하는 햄릿'이 된다.
엄마는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강력히 주장한다.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공들였는데, 아낌없이 줄 걸 다 주었는데 하며. 문득 ‘아낌없이 주는 사랑' 대신 '아끼면서 주는 사랑’이 되었더라면 아들과 엄마 사이는 어땠을까.
<넷> 데면데면, 불가근불가원, 아끼면서 주는 사랑
우리 집에 장박하는 길고양이와 사이가 더 좋아지지 않길 바란다. 만약 녀석이 앞에 나타나 애교를 부린다면 다음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 나가서도 녀석의 사료와 물 챙기기에 신경 쓰일 터. 집도 더 낫게 지어줘야 하고 겨울에는 난방까지 고려해야 할지도.
지금처럼 어차피 길고양이니 사료 며칠 떨어졌다고 걱정 안 해도 된다. 없으면 어디 가서든 먹이 구해 먹을 터. 한 번씩 볼 때마다 호피 무늬라 이쁘기도 하여 만지고 싶기도 하지만 그 뒤가 감당이 안 돼 지금처럼 데면데면하게 지냈으면 한다.
다만 사료와 물은 내가 머무는 한 제공하겠고 집도 허름하지만 만들어놓았으니 거기 머무는 건 상관없다. (실제로 안 머무르는 듯) 아직 수컷인지 암컷인지 모르지만 만약 새끼까지 낳아 데려온다면... 그렇게까지 발전하면... 아찔하다.
사람 사귐에 불가근불가원 원칙도 깨뜨리지 않으련다. 한 사람에게 너무 깊이 빠져드는 성격이라 혹 배신 또는 실망의 모습 보면 너무 힘드니까. 예전에 어떤 사람의 좋은 면만 보다가 어느 한순간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 몇 번이나 거듭되면서 더욱 그렇다.
앞으로 까촌남(까칠한 촌놈)으로 계속 살 것 같다. 길고양이에게도 사람에게도. 다만 아끼면서 주는 사랑만은 아들딸에 대해선 훌륭히(?) 실천했는데 손주들에겐 어려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