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칡의 지구 정복 시나리오(제4부) *
“그곳과 노루나 고라니는 어떻게…”
“곰곰 생각해 봤지. 멧돼지가 가끔 도시 한복판에도 나타나면 사람들은 무척 싫어하잖아. 쏘아 죽이려 하고. 그런데 노루나 고라니는 달라. 고수부지에나, 도심에 가까운 공원 같은 곳에 살면 오히려 사랑받거든.
그러니 녀석들이야말로 사람 사는 곳에 가장 가까이 진출할 수 있는 존재거든. 그 녀석들도 우리가 필요하지. 양식을 끊임없이 공급할 수 있잖아. 우리가 제안하면 녀석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거야. 녀석들에겐 양식을, 우리에겐 도시 진출을.”
갑자기 모든 칡들의 마음이 떨려옵니다. 사람 가까이 간다니요? 사람보다 무서운 게 없는데.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인데. 사람들 눈에 띄는 곳에까지 진출한다니요? ‘버드나무칡’이 가장 앞서서 묻습니다.
“어르신 말씀대로 고수부지나 도심공원까지는 진출한다고 합시다. 그래도 도시를 점령하려면 이곳저곳 뿌리를 뻗어나가야 하는데, 그곳은 아스팔트가 쫙 깔려 있으니 어떻게 나아갈 수 있지요?”
“바로 그게 가장 큰 문제야. 아스팔트 아래는 흙이니까 만약 뿌리는 내린다고 쳐도 햇빛을 보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아스팔트를 뚫고 나오는 기술을 개발해야 해. 우린 그럴 수 있을까. 물론 현재는 안 되지. 그런데 나는 쑥을 보고 깨달았어.
쑥은 말이야, 작년에 났던 길 위에 아스팔트가 놓이면 당연히 죽는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죽지 않아. 오히려 뚫고 나오지. 그 하찮은 쑥도 하는데 우리라고 못할 게 뭐야. 만약 아스팔트 아래에서 뿌리를 내리고 그걸 뚫고 나오는 기술만 개발할 수 있다면 우리의 꿈은 꿈만으로 그치지 않아.”
“쉬운 게 없고, 우리만으로 되는 게 없군요.” 하고 말한 이는 소나무칡입니다.
“세상에서 홀로 이룰 수 있는 건 없어. 남의 것을 보고 배우고, 남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일단 목표를 이뤄야 해. 이룬 다음에는 힘이 센 자가 모든 걸 손에 쥘 수 있지.
그런 의미에서 담쟁이에게서도 배워야 해. 담쟁이는 흙이 아주 조금만 있어도 뿌리를 뻗을 수 있잖아. 또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높은 빌딩도 올라갈 수 있고. 우리는 생명 있는 나무들만 타지만 담쟁이는 돌이든 콘크리트든 관계하지 않고 올라가.
그러니 그들로부터 생명 없는 존재에 붙어서 올라가는 기술도 개발해야 해. 그래서 우리가 온 빌딩을 다 덮는다고 상상해 봐.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어. 그 황홀한 날을 나는 죽어서 볼 수 없겠지만 너희들은, 아니 너희 자식들은 볼 수 있을 거야.”
칡들은 다시 박수를 칩니다. 소리가 끊어질 때가 되면 이어지고 또 끊어질 때면 이어지고. 한참을 이어지던 박수 소리는 ‘버드나무칡’이 질문하면서 다시 끊어집니다.
“우리가 이 나라는 정복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 같은 큰 나라는 어림없겠지요?”
“걱정 마. 내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미국 오대호 주변이 우리들 때문에 황폐해졌다고 난리인 모양이야. 얼마나 희망적인 일이야. 게다가 미국에 자라고 있는 칡이 원래 거기 출신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종자가 뿌리내렸다는 얘기도 있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걱정할 게 없잖아. 동맹을 맺으면 우리나라 칡이 전 세계를 지배할 날이 얼마 안 남았어. 그런 세상이 꼭 올 거야.”
칡대왕은 그 말을 끝으로 숨을 할딱거립니다. 칡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칡대왕의 흐릿한 눈에 칡덩굴탱크가 도심으로 진격하는 광경을 떠오릅니다. 눈이 서서히 감기면서 칡덩굴탱크도 사라져 가지만 그의 입가엔 미소가 번집니다. 그는 저승에 가서 칡이 지구를 정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