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 '길들이다'와 '길들여지다'
* ‘길들이다’와 ‘길들여지다’ *
<하나>
‘길들이다’란 낱말에 대한 의미를 가장 쉬우면서도 폭넓게 해석한 글은 아마도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일 겁니다.
어린 왕자는 자기가 살던 별에서 사랑했던 장미의 냉담함에 상심하여 이 별 저 별을 떠돌다가 여우를 만납니다. 반가움에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 같이 놀자고 하자, “난 너하고 놀 수 없어. 난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그 말에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 ‘길들이다’의 뜻을 묻습니다. 이에 여우는, “관계가 생긴다는 뜻이야. ~~ 네가 나를 길들이면 서로가 필요해져. 너는 나한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될 테구.”
<둘>
몇 년 전 한 달가량 ‘중남미 여행’을 다녀온 뒤 창고 문을 열었을 때 거기 몰래 들어간 길고양이 한 마리가 문이 닫혀 나오지 못하다 굶어 죽은 내용의 글을 배달한 적 있습니다.
그 일 뒤로 늘 길고양이에게 마음이 쓰였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제 잘못은 아니나 만약 여행 안 가고 집에 남았더라면, 아니 여행을 갔더라도 사나흘만 다녀왔더라면, 더욱 이웃에게 우리 집을 한 번쯤 돌아보고 창고도 한 번 살펴봐 달라고 했더라면...
그래서 집에 드나드는 길고양이에게 죄책감을 느껴 먹이 주고, 얼어 죽지 말라고 보온재 덮은 집을 마련해주는 일을 했다는 얘기를 전해드렸지요. 그러면서 섭섭함도 표했습니다. 도무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멀리서 저만 나타나면 후다닥 사라져 볼 수 없다고.
그 사이 많은 진전을 거듭해 온 결과 이제 드디어 1미터 앞까지 와 제가 놔둔 사료나 간식을 아무렇지 않게 먹습니다. 처음엔 녀석의 동료(어쩌면 부모)를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으니 그에 대한 보상이라 여기면서도 사료비가 아깝고 때때로 사료 챙겨주는 일에 짜증도 났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일을 함은 너희를 배려해서다’라는 마음이 늘 가슴 저 밑바닥에 깔려있었지요. 적당히 시간 지나면 끊으려 마음먹으면서. 그런데 한 달 두 달 석 달... 지나면서 가만 보니 녀석이 꼭 먹이만 축내는, 집에 하등 도움 안 되는 길고양이는 아니었습니다.
전엔 잘 깎아놓은 잔디밭에 똥 싸고, 오디 떨어지는 그물 위로 마구 오가고 음식물 쓰레기 묻어놓으면 파헤치는 등 행패를 부렸는데, 싹 없어졌습니다. 어디서 똥 누는지 보이지 않고, 오디 그물로 가지 않고, 음식물 쓰레기도 건드리지 않고, 게다가 들쥐마저 싹 없어졌습니다.
여태까지 제가 녀석을 위해 무한 사랑(?) 베풀었다고 여겼건만 그에 못지않게 녀석도 저에게 좋은 일을 했던 겁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짐승도 길들이기 나름이야. 내가 길고양이 길 잘 들였잖아.’
괜히 어깨가 으쓱, 입꼬리가 슬쩍 밀려올라가고, 다른 사람 만나면 자랑 삼아 얘기 하고, 굉장히 동물 사랑에 진심인 사람처럼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문득 뽕나무 아래 떨어진 오디가 모이도록 깔아놓은 그물 위에 가득 쌓인 ‘오디’를 가져와, 테라스에 놓고 고르는 작업 – 주로 나뭇가지와 잎사귀 제거 –을 하는데 바로 맨아래 계단에 녀석이 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제 눈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그땐 오디 고르는 작업이 많이 밀려 거기에만 매달렸는데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있었습니다. 가끔 작은 소리로 ‘야옹!’ 하거나 내가 고개를 들면 눈 마주쳐주고. 아무래도 배고픈가보다 싶어 바쁜 중에도 먹이를 꺼내 현관 앞 계단에 놓인 접시에 담아주자 허겁지겁 달려와 먹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잠시 후 다 먹었는지 나를 보더니 먹이 달라고 할 때 내는 소리랑 달리 훨씬 크게 “야옹!” 하고 사라졌습니다. 그 큰 '야옹' 소리에 갑자기 온몸이 쩌릿해졌습니다. 저 소리는, 저 소린 제게 들려준 고마움의 표시였기에. 그러니까 길고양이도 먹이 준 이에게 고마움을 표한다는 사실을.
<셋>
다시 [어린 왕자]로 돌아갑니다.
어린 왕자가 길들이는 과정에서 여우에게 꼭 필요한 점을 묻자, “참을성이 있어야 해.” 하고 답합니다. 이어서, “처음에는 나한테서 조금 떨어져 그렇게 풀밭에 앉아 있어야 해. 내가 곁눈질로 너를 봐도, 너는 말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지. 그러나 하루하루 조금씩 가까이 앉게 될 거야”
어떻게 생텍쥐페리는 80년이나 지나 - [어린 왕자], 초간 1943년) - 대한민국 경주 산골 달내마을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았을까요? 처음에는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던 녀석이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오면서 눈치를 살피다가 어느새 자연스레 눈도장도 찍고.
그때 우리 둘 가운데 하나라도 참을성이 조금만 부족했더라면 저는 나타나기만 하면 쫓아낼 궁리부터 했을 테고 녀석도 나를 적으로 알고 도망쳤으련만. 조금 떨어진 상태에서 앉아 참을성 있게 기다려줘야 한다는 사실. 아무리 멀찍이 떨어져 있어도 시간 가면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하게 된다는 사실.
여기서 소설에 나오는 한 구절이 더 생각납니다. ‘길들이다는 서로 관계를 맺는 일, 즉 서로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존재가 되는 일’이라고. 그렇지요, 길고양이와 저는 서로를 알아가면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관계는 서로를 믿음에서 형성됩니다. 적어도 녀석에게 저는 적이 아니라 아군이라는 인식이 심어졌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깨달음도 얻었습니다. 여태 제가 길냥이를 ‘길들여왔다’고 여겼습니다. 먹이 주면서 친해지려 노력했으니 제가 녀석을 길들였다고. 헌데 아니었습니다. 길고양이도 저를 길들였습니다. 때가 되면 먹이를 갖다주도록 만들었고, 배가 고파 울 때와 고맙다고 울 때가 다름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기쁘게 사료 줄 수 있습니다. 사실 사료값이야 큰돈 들지 않으나 때때로 챙겨주는 일이 귀찮았는데 이젠 귀찮지 않다고 여겨졌습니다. 신통하게도 제 차소리를 기억하는지 차 내릴 때면 어느새 나타나 저를 봅니다.(가끔 오지 않을 때도 있지만) 손을 흔들면 잠시 보다가 나무 사이로 들어가고.
이제 누가 누구를 길들이고 누가 누구에게 길들여졌나를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길고양이가 제 차소리에 반응하듯이 저 역시 도착하면 녀석이 머무는 곳으로 눈길이 절로 가니까요.
물론 아직 많이 멀었습니다. 1미터 이내 다가오지도 않고, 손을 내밀면 녀석은 손 내밀기보다 달아나려고 하니까요. 그래도 지금 진도로 나아가면 한 달 내 마당이나 텃밭에 나들 때마다 바로 옆에 따라다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쩜 그럴 때가 올까요?
저도 누군가에게 길들여지고 싶습니다. 길들이기보다 길들여지는 일. 참 아름다운 일 아닙니까. 호냥이(제가 붙인 이름, 호랑이 + 길냥이) 한 마리가 주는 깨우침, 오늘은 더욱 평화롭고 향기로운 날이 될 듯합니다.
*. 사진 6번과 7번은 우리 집에 드나드는 호냥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길냥이에게 사료를 주면 자꾸 늘어나게 됨을 압니다만, 오늘 글은 그런 무거운 주제를 다룬 글이 아니라 그냥 붓 가는 대로 쓴 수필로 봐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