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7편 : 김강태 시인의 '없다'
@. 오늘은 김강태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없다
김강태
꽃 지는 소리마저 없다
언젠가 꽃이 열렸는지 알 수가 없다
꽃이 없다
그림자를 벗어던지고 던진 꽃잎이 없다
새끼를 밴 아픔이 없다
마지막 흘린 땀자욱도 없다
비어 있지는 않지만
내가 없으니 모두가 없어라
구름꽃무늬 진 바다인가 저 머얼리
문득 바람이 푸르르니 보인다
스스로 없다 답하는 이 없다
보일 듯 말 듯
꽃 지는 소리마저 없다
꽃의 자취도 없다
- [숨은 꽃](1988년)
#. 김강태 시인(1951년 ~ 2003년) : 충남 부여 출신으로 1978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한국문학도서관(KLL)’ 대표이사와 도서출판 [푸른 나무] 발행인으로 있다가 대장암으로 별세.
<함께 나누기>
아침마다 아내랑 운동 삼아 산책 삼아 마을 한 바퀴 도는데, 어느 날 이렇게 말하더군요.
“어, 아카시아꽃이 없어졌네요.”
그러니까 날마다 보이던 아카시아꽃이 다 져 이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카시아꽃뿐이랴, 봄날 피었던 꽃은 다 지고 여름에 어울리는 꽃만 핍니다. 분명 어제까지 피어 있었건만 우린 이내 잊어버립니다.
지금 장미가 한창입니다. 요염한 새빨간 빛이 유혹하지만 조금 지나면 져버리고 우리는 또 잊어버리겠지요. 시인도 그렇게 여겼나 봅니다. 꽃이 지는데 꽃 지는 소리마저 없고, 더욱 언제 꽃이 열렸는지 알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꽃이 없습니다. 꽃이란 이름의 그림자를 한때 드리웠건만 그 그림자를 벗어던진 뒤엔 꽃이 없습니다. 꽃잎이 없기 때문이지요.
“새끼를 밴 아픔이 없다 / 마지막 흘린 땀자욱도 없다”
꽃이 피는 건 동물이 새끼를 배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새끼를 배 낳게 될 때까진 아픔과 땀자국이 어리게 마련입니다. 헌데 꽃도 동물처럼 새끼(열매)를 배고 낳건만 우리는 그의 아픔도 땀자국도 모르고 지나갑니다.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부분에 시인의 눈은 번뜩입니다. 식물이 꽃 피고 열매 맺음 속에 아픔이 있음을 시인만 알아차립니다.
“비어 있지는 않지만 / 내가 없으니 모두가 없어라”
나무(혹은 풀)는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해 전 생애를 다 바치지만 언제 피었는지, 언제 졌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꽃을 피우기 위해 살았던, 꽃으로 존재하고자 하였던 그 꽃은 흔적이 없습니다. 오직 남은 건 `없다'는 사실뿐.
“꽃 지는 소리마저 없다 / 꽃의 자취도 없다”
이 시에서 가장 오래, 그리고 자주 반복되는 시어는 무엇입니까? 바로 ‘없다’입니다. 마지막에 와 두 번 또 반복됩니다. 이렇게 같은 시어의 반복은 읽는 이에게 뭔가 들려주려는 것 같지 않습니까?
즉 ‘없다’가 아니라 있는데 없어 보인다. 그럼 무엇이 있었을까? 바로 없다고 지나쳤던 것의 ‘있음’. 아픔도 땀자국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잊고 지나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일깨움을 이 시는 넌지시 일러줍니다.
그렇지요, 동물이 새끼 배고 낳고 하면서 받는 고통은 다 알면서도 식물이 꽃피우고 열매 맺음이 똑같음에도 우린 잊고 있다는 사실.
우린 여러 분야에서 사람이나 짐승의 노고를 잊고 살았습니다. 새벽길을 깨끗이 쓴 청소부를, 자신의 논밭에 소가 밭 갈고 논 뒤엎기 해줄 때의 고마움 등. 나무를 잘라 집을 만들고 가구를 만들어 생활에 편리함 주는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그 나무가 겪은 아픔을 알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나무가 잘릴 때 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 분명히 아픔을 느꼈으련만, 꽃을 꺾어 화분에 꽂아놓으면서도 우린 꽃의 아픔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는 우리가 모르고 지나치는 것들에 대한 일깨움을 주는 작품으로 저는 읽습니다. 물론 저랑 다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다르게 읽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시의 강점이니까요. 제 해설은 다만 참고로 하시고 여러분에게 다가온 다른 소리를 들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