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 고라니 길
* 고라니 길 *
언양에 오면 짬 날 때마다 태화강 지류인 남천내 주변을 걷는다. 운동도 되고 볼거리도 있고 냇가 갈대도 한창이라 기분도 상쾌하다. 이를 보면 도시가 발전하려면 강이 흘러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한강을 둔 서울도 마찬가지요, 태화강이 시내를 관통하는 울산도 마찬가지다.
그제 다리 위를 지나다 고개를 내리뜨렸더니 묘한 게 보였다. 그냥 지나쳤으련만 겨울에 그곳을 걸어본 적 있기에 더욱 눈에 들어왔으리라. 사진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직접 눈으로 보면 갈대숲 사이로 난 길이 뚜렷이 보인다. 바로 고라니가 다니는 길이다.
일부러 사람이 냈을까? 아니다. 사람의 길은 예전엔 자연을 닮아 휘어져 구불구불했으나 언제부턴가 직선이다. 그러니까 울산시에서 일부러 고라니 다니는 길을 만들 리가 없고 만들었다 해도 저렇게 원만한 곡선이 되진 않았으리라.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면 고라니는 애물단지다. 우리 집만 해도 밭에 들어오지 못하게 그물로 울타리를 쳐놓았다. 그냥 내버려 두면 남새(채소)는 녀석이 다 뜯어먹는다. 하필 가장 순이 연할 때를 노리니 막상 필요해 챙기려 하면 먹을 게 보이지 않는다.
사실 멧돼지가 가장 위험한 놈이나 눈에 잘 띄지 않는데 반하여 고라니는 무시로 드나들어 텃밭을 망친다. 하여 유해조수로 지정된 까닭이기도 하다. 얼마나 많은지 운동 삼아 걷는 마을 한 바퀴 길에도 보이고, 차를 몰아도 보이는 데다, 밤에는 짝지으려 부르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게다가 일주일에 한 번쯤 길에는 차량동물사고(로드킬)로 희생된 사체가 눈에 띈다. 밤에 강한 헤드라이트랑 마주치면 순간적으로 시각 잃어 차에 그대로 부딪힌다. 며칠 전엔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에 우리 텃밭 출입구에 자리한 웬 그림자를 보곤 심장이 덜컥했다. 사실 녀석이 더 놀랐겠지만.
시골에선 그리 밉상인 고라니를 도심에서 보니 느낌이 다르다. 지금은 갈대랑 잡풀이 많이 자라 들어갈 수 없지만 지난겨울 저길 걷다가 녀석을 만났다. 그때 녀석은 자기들이 만든 길을 따라 유유자적 걷던 중이었는데 나를 보자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그때부터 오가다 내려다본다. 드물게 ‘고라니 길’로 걸어가는 녀석을 보곤 했다.
그 길은 이른 봄까진 제대로 보이다 여름이 오면 사람 키보다 더 자란 갈대가 길을 덮는 바람에 흐릿하게 보인다. 한참을 보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고라니가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보았던들 워낙 먼 거리라 휴대폰으론 잡히지 않았을 터.
냇가엔 다른 짐승이 드물고 오직 고라니 천국이다. 아 물론 강에 사는 청둥오리, 물병아리, 쇠백로 같은 철새들은 제외하고. 고라니가 저기를 터전으로 삼은 까닭은 잡식성에 맞게 먹잇감이 풍부해서다. 이른 봄엔 갈대 같은 풀들의 새순이 입에 맞을 테고, 강에 떠내려오는 먹이도 있을 터.
앞에서 언급했지만 고라니가 농가에 너무 피해를 준다 하여 유해조수로 지정되었다. 허나 알고 보면 세계적으론 희귀하여 멸종위기종에 속한다. 하필 전 세계 개체 중 우리나라에만 90% 이상이 산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동물보호단체에선 고라니를 '유해조수 지정'에서 풀어달라는고 요청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즈음에서 궁금하다. 왜 고라니가 하필 우리나라에만 많은가.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본다.
첫째 고라니를 잡아먹는 호랑이, 늑대 같은 천적이 사라지고, 경쟁자인 노루는 채식만 하다 보니 개체수가 감소하는데 고라니는 잡식성이라는 점.
둘째, 고라니는 다른 사슴류보다 새끼를 많이 낳는 데다 기후 온난화로 겨울이 따뜻해지면서 어린 새끼들의 생존율이 높아졌다는 점.
셋째 산골에서만 살던 고라니가 도시 하천 정비로 서식지의 범위가 한층 늘어났다는 점.
‘고라니 길’을 보면서 묘한 감상에 젖는다. 시골에선 그리도 애먹이더니 도시에서 볼 때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처음 한 마리가 지나갔으리라. 그 한 마리의 흔적은 이내 없어진다. 다음 또 한 마리가 지나갔고. 그래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마릿수가 늘어날수록 그 발자국은 뚜렷해지고 마침내 그들의 길이 된다. 사람의 길도 그렇지 않은가. 어떤 길이든 처음 누군가가 걷고 다음 또 다른 사람이 걷다가 길이 되었듯이.
고라니 길도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걷다 보니 만들어졌다. 아주 단순한 이치지만 꽤나 중요하다. 이후 또 다른 녀석에게도 이어졌으니. 처음 우리나라에 와 정착하려 했던 고라니는 무척 힘들었으리라. 어쩌면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멸종 위기를 겪었으리라.
언양 남천내 갈대숲에 처음 들어온 고라니도 막막했으리라. 갈대가 무성한 여름이면 몰라도 허허벌판인 겨울에 살기는... 짐작에 큰 다리 아래 교각이라면 비도 피하고 추위도 피하고. 그렇게 한 녀석이 자리 잡자 다른 녀석도 오고.
그런 식으로 고라니는 우리나라 어디서든 자리 잡았으리라. 그리하여 고라니 대국(大國)이 되었으리라. 비록 유해조수로 지정될 정도로 밉상이지만, 밭 입구에 들어오지 못하게 그물을 쳐놓았지만 실상 고라니가 주는 피해가 얼마나 될까.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고라니가 유독 우리나라에만 많이 사는 이유를 학자들은 위에서처럼 세 가지 들고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으니까. 그 조건은 일본도 대만도 갖추었다는데 거긴 없으니까. 그러니 뭔가 다른 요인이 있을 것 같은데...
국화(花), 국조(鳥)가 있다면 국수(獸 : 짐승)도 있을 터. 우리나라 국수를 고라니로 하자면 욕먹을지... 사실 고라니로 인한 피해는 울타리만 제대로 만들면 막을 수 있다.
이참에 고라니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해보면 어떨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겐 워낙 희귀하니까. 즉 시군마다 고라니 공원을 만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몇 년 전 남미에 갔더니 알파카라든지 구아나꼬 같은 동물이 자유롭게 뛰노는곳을 흔히 보았고, 그들 모형의 관광용품도 많았다.
고라니로 인한 피해보다 오히려 고라니가 가장 살기 좋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위상이 더 가치 있지 않을까. 그제 남천내 다리 위에서 내려다본 ‘고라니 길’이 예사롭지 않은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