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0편 : 윤제림 시인의 '다음번에는'
@. 오늘은 윤제림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다음번에는
윤제림
또 벌레가 되더라도 책벌레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책벌레의 몸을 받더라도 책에서는 잠이나 자고
동트거든 나가서 장수벌레나 개똥벌레를 돕고
들어오면 쌀벌레나 좀벌레를 돕겠습니다
책벌레가 되더라도 과식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루에 한 줄
짜고 맵고 쓴 글자만 골라
약으로 먹겠습니다
청컨대, 한 번은 누에가 되고 싶습니다
외롭게 자다가, 홀연히
당신 앞에다
녹의홍상 한 벌
꺼내놓으렵니다
무당벌레나 자벌레만 되어도 당신을 위해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곤충도감에서 자야겠습니다
-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2020년)
#. 윤제림 시인(1960년생) : 충북 제천 출신으로 1987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 시인이면서 ‘한국방송광고대상’에서 수상한 카피라이터로 [카피는 거시기다]란 책도 펴냄.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무거운 주제를 아주 싱겁게(?) 표현하는 능력을 지닌 시인이란 평을 들음
<함께 나누기>
가끔 한 번 더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무엇이 될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좀 의외겠지만 저는 농부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아 특수작물이나 스마트팜 등으로 돈 많이 버는 부농이 아니라 죽도록 일만 하는.
어제도 시골에서 하루 종일 일하며 보냈습니다. 오디 줍기 위해 뽕나무 아래 깔아놓은 망(그물)도 거둬야 하고, 햇빛 잘 안 드는 영산홍과 잔디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기 위해 삽질을 하면서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러면서 37년 교직생활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교직은 육체적으론 그리 힘들지 않지만 사람 사이의 일로 머리 써야 한다면 농사는 오로지 몸으로 때워야 합니다. 몸으로 때움이 더 힘들 수 있지만 그 일 하는 동안은 사람이 없어지고, 잡념도 없어지고 오로지 거기에 매이니까요.
시로 들어갑니다.
“또 벌레가 되더라도 책벌레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화자는 다시 윤회한다면 벌레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다만 책벌레는 되고 싶지 않다고. 왜 그럴까요? 책벌레는 진짜 벌레가 아니어서? 학문에만 몰두하다 보니 현실 삶의 아픔과 힘듦을 모르고 지내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풀어봅니다. 해서 다음 시행에 비록 책벌레의 몸으로 태어나더라도 책은 꿀잠 자기 위한 도구로 쓸 뿐이라는 내용이 이어졌겠지요.
“동트거든 나가서 장수벌레나 개똥벌레를 돕고 / 들어오면 쌀벌레나 좀벌레를 돕겠습니다”
이 시행에선 비유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장수벌레, 개똥벌레, 쌀벌레, 좀벌레’는 어떤 비유의 뜻을 지닐까요? 여기 나온 벌레가 강한 이미지보단 약한 이미지라 누군가를 해치기보단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풀어봅니다. 그렇다면 책만 읽고 살면 세상에 얼마나 힘든 사람이 사는지 잘 모를 테니, 현실과 부딪히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봅니다.
“책벌레가 되더라도 과식은 하지 않겠습니다”
비록 책을 읽는 삶을 살게 되더라도 결코 책에만 매몰하지 않고 실제 생활에 도움 되는 길을 찾는 길잡이로 삼겠답니다. ‘글자를 약으로 삼아 하루 한 줄씩 소화’하는 것은 지나친 탐욕이 아닌 절제된 삶의 태도를 상징함으로 보입니다.
“청컨대, 한 번은 누에가 되고 싶습니다”
녹의홍상(여인네의 녹색 저고리와 붉은 치마)을 만드는 비단을 보면 설마 이런 보물을 누에가 만들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볼품없는, 아니 징그러운 벌레가 만들어내는 기적의 보물. 화자는 스스로 볼품없지만 누군가를 빛나게 만드는 일을 하겠다고.
“무당벌레나 자벌레만 되어도 당신을 위해 /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록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음지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 쉬운 일 같지 않건만 이런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우린 압니다. 왜냐면 우리 대부분 내가 빛나기를 원하지 남이 빛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은 곤충도감에서 자야겠습니다”
화자가 이 세상에 다시 올 때 벌레로 태어나고 싶다 했으니 그에 따른 종결법입니다. 비록 벌레라는 낮은 존재로 살아가더라도 남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참으로 곱습니다.
이번이 아닌 다음번이라면,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이라면 어디서 무엇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는지 곰곰 생각해 보시길. 다만, 나를 위한 다음보다는 ‘남을 위한 다음’에 더 비중을 두면서. 누에가 자는 방, ‘잠실(蠶室)’에 잠시 들어가 누운 양 생각해 보시길.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는데, 첫째 사진에 나온 징그러운 벌레(누에)가 만든 고치로 어여쁜 녹의홍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참 신비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