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 감자와 파인애플
* 감자와 파인애플 *
지난주 아는 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런저런 얘기 오가던 중에 혹 감자 캘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묻기에 그러잖아도 다음 주쯤 캘 거라 했다. 그러자 목소리를 낮추더니 혹 캘 때 함께 할 수 없느냐 했다. 유치원생인 손주가 유치원에서 감자 캐러 가는 일정 잡혔는데 사정상 못 가게 됐음을 덧붙이면서.
언제쯤 가능한가 하니 다음 주 토요일(내일, 6/21)에야 시간 난다고 해 그러마 했는데 오늘부터 장마가 시작돼 약속을 깨뜨려야 했다. 그와의 약속은 깨뜨렸지만 비 오기 전에 감자를 거둬야 한다. 왜냐면 오래 물에 잠겨 있으면 썩거나 아니면 싹이 돋기에.
어제 아내랑 감자를 캤다. 생각보다 잘다. 사실 일주일이나 열흘쯤 뒤에 캐려 했는데 올해 장마가 일찍 드는 바람에 덜 자란 상태에서 캤으니. 손님 초대했더라면 민망할 뻔했다. 크기 작으면 양도 얼마 안 돼 손주가 만족할 만큼 감자를 손에 쥐어 줄 수 없기에.
감자 관련 걸작 하면 김유정 작가의 [봄봄]을 빼놓을 수 없다. 한 구절을 보자.
"~~ 조금 뒤에는 제 집께를 할금할금 돌아보더니 행주치마의 속으로 꼈던 바른손을 뽑아서 나의 턱밑으로 불쑥 내미는 것이다. 언제 구웠는지 더운 김이 홱 끼치는 굵은 감자 세 개가 손에 뿌듯이 쥐였다.
"느 집엔 이거 없지?"
하고 생색 있는 큰소리를 하고는 제가 준 것을 남이 알면은 큰일 날 테니 여기서 얼른 먹어 버리란다.”
이 구절 뒤에 작중화자인 나의 대답이 둘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게 돼 점순이가 사사건건 나를 괴롭히는 요소가 된다.
"난 감자 안 먹는다. 너나 먹어라."
왜 이리 답했을까? 그냥 주는 대로 먹었으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갔을 텐데. 물론 소설은 재미없고 우리가 읽지 않을 테지만. 바로 점순이가 말한 "느 집엔 이거 없지?"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나는 소작인의 아들이고, 점순이는 마름의 딸이다.
논밭이 아주 많은 대지주는 일일이 소작인 상대할 수 없어 중간관리자를 두는데 그가 바로 마름이다. 당시 마름은 소작인에게 소작료를 징수하고 토지를 관리하면서 소작을 주는 권한까지 지녔기에 소작인 입장에선 지주보다 마름이 더 무서운 존재였다.
그러니까 평소 나는 부모로부터 마름의 자식들에게 공손해야 한다는 식의 교육을 받아 자격지심이 있던 터. 그런데 점순이가 고작 감자 하나 주면서 "느 집엔 이거 없지?" 하니 자존심이 상해 "난 감자 안 먹는다. 너나 먹어라." 했으리라.
소설에서 점순이는 이성에 눈을 뜬 상태나 나는 그러지 못한 쑥맥이다. ‘같은 나이일 땐 여자가 남자보다 성숙하다.’라는 말이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 작가는 이성에 눈뜬 처자와 쑥맥인 사내가 엮어가는 잔잔한 사랑을 아주 의뭉스럽게 전개시킨다.
나에게도 "느 집엔 이거 없지?"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 다만 감자가 아닌 '파인애플'일 뿐.
45년 전 부산 서면 근처 모 여중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그 학교에선 해마다 신학년 초에 가정방문을 갔다. 선생님들은 내키지 않았지만 사립학교라 당시 경영진의 결정에 항의할 처지가 못 되어 따라야 했고.
그 학교 학생들의 구성은 지금과 달리 한창 부산이 뻗어나갈 때라 비록 중심가에 자리했지만 부유층과 빈곤층이 함께 했다. 70명이나 되는 가정을 일일이 챙겨 월~금요일까지 다 돌고 난 뒤 토요일 두 집을 남겨두었다.
한 집은 착하고 이쁘고 가장 공부 잘하는 소녀의 집이었고, 다른 한 집은 의사의 집. 토요일로 잡은 건 두 집 다 그때 와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첫째 소녀의 집에선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말을 전하긴 했지만 너무 반듯하게 생활하는 소녀의 집이 어떤지 궁금해서 밀어붙였다.
깔끔한 입성과 밝은 표정으로 보아 괜찮게 사는 집인 줄 알았는데 산으로 산으로 올라가기에 깜짝 놀랐다. 지금 같으면 산 위에 별장 가나 여겼으련만 도착하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집이 아니라 움막이었다.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큰 바위 아래 나무기둥 둘을 세워 앞은 거적으로 막은 상태.
들어가니 어머니는 누워계셨는데 한눈에 집안(?) 모습이 확 들어왔다. 요강이 보이고 나무판자 위에 이불도 보이고. 내가 눈시울을 붉히자 어머니 말씀,
“선생님 우린 이래 살아도 저는 행복합니다. 애 아빠가 돌아가시고 저는 병을 얻었지만, 아들이 신문 배달하면서도 전교 일등. 딸도 저 대신 집안일 하면서도 전교 일등.”
두 번째 집으로 갔을 때다. 지금도 그 아파트 이름은 안 잊힌다. 한때 서울 강남 타워팰리스가 고급아파트 대명사였지만 내게 최고급 아파트는 당감동 ‘삼익아파트’였다. 이번 방문한 집은 아빠가 제법 큰 병원의 원장님이셨다. 아파트를 그때 생전처음 방문한 셈이다. 허니 들어갈 때부터 기 죽을 수밖에.
그런데 소녀의 어머니가 내놓은 다과류. 첫눈에 희한한 게 보였다. 속살이 노오란. 파인애플이었다. 그림이나 TV에서야 봤지만 실제로는 처음 보는. 입에 절로 군침이 돌았다. 그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지금도 안 잊혀진다.
“선생님, 이거 처음 보시지요. 한번 맛보세요.”
저 신비로운(?) 과일을 포크로 먹어야 하나 젓가락으로 먹어야 하나 궁리하던 참에 들려온 어머니의 말씀.
“이거 처음 보시지요”
아마 무심코 하신 말씀이었으리라. 절대 선생님을 무시하려는 의도를 담지 않은. 순수하게 건넨 인사라고 지금은 그리 여긴다.
허나 그때 나는 속이 좁아 그러지 못했다. 그냥 먹을까? “아, 난생처음 파인애플 먹을 기회를 갖습니다. 고맙습니다.” 할까 하다가 결국 핑계 만들었다.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점심을 급하게 먹고 오느라 속이 좋지 않아 아무것도 먹을 수 없습니다.”
동백꽃에서의 점순이가 한 말 "느 집엔 이거 없지?"와 학부형이 하신 말씀 “이거 처음 보시지요.”는 분명 다르다. 허나 당시의 나에겐 똑같이 들렸다. 아마도 ‘찌지리 가난’이란 자격지심이 늘 밑자락에 깔렸던 탓일까.
그다음 일요일, 일부러 부전시장을 뒤지고 다녔다. 그 큰 시장에 아무리 둘러봤으나 파인애플은 없었다. 나중에사 당시 그런 고급 과일은 백화점에서야 판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백화점까지 가서 사겠다는 마음까진 먹지 못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아 감자와 파인애플, 점순이와 학부형, "느 집엔 이거 없지?"와 “이거 처음 보시지요.”
어제 감자 캐면서 글 한 편 얻었다. 지금은 파인애플 사 먹을 형편이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 사진은 글의 흐름에 맞게 구색을 갖추려 넣었는데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