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361)

제361편 : 정철훈 시인의 '전철에서 졸다'

@. 오늘은 정철훈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전철에서 졸다
정철훈

몇 정거장을 지나친 것을 뒤늦게 알고
화들짝 일어섰다 멋쩍게 주저앉는다
늦은 장마철이어서 그나마 빈자리가 있었던 것인데
다리는 무겁고 눈꺼풀은 저절로 감기고
내 모르는 새 지나친 정거장만큼
생을 훌쩍 건너뛸 수는 없을까
내릴 곳을 잊은 채 두 눈을 멀뚱거리는
낯선 얼굴이 차창에 어룽댔다
실은 내릴 곳을 영영 잊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나친 정거장만큼이나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는 자각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스쳐 지나간 정거장으로 돌아가야 할지
그대로 태연히 앉아 있어야 할지
다음 행선지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서 내릴지
- [개 같은 신념](2005년)

*. 어룽대다 : 뚜렷하지 아니하고 흐리게 어른거리다.

#. 정철훈(1959년생) :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1997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 국민일보 논설위원과 문화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시인으로 소설가로 전기 작가로 열심히 활동.




<함께 나누기>

저는 차를 타면 이내 잠이 듭니다. 그게 멀미의 한 현상이라더군요. 다행히 제 차를 몰 땐 괜찮지만. 그때도 남들보다 오래 몰지 못하고 쉬어야 합니다. 버스나 기차를 탈 때 목적지가 차고지나 종착역이면 걱정 없으나 중간역이면 긴장합니다. 혹 지나친 뒤 잠이 깨기도 해 다시 돌아간 적 몇 번 되니까요.

시로 들어갑니다.

“몇 정거장을 지나친 것을 뒤늦게 알고 / 화들짝 일어섰다 멋쩍게 주저앉는다”

누구나 가끔 겪는 일입니다. 다리는 무겁고 눈꺼풀은 저절로 감기는 중압감에 깨어나지 못하고 목적지를 지나쳐 버리는 일. 헌데 이 시행에서 ‘화들짝 일어섰다 멋쩍게 주저앉는다’를 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늦게라도 목적지 지나쳤음을 깨달았으면 퍼뜩 내려야 할 텐데.
'다시 주저앉는다'는 표현에서 몇 가지 유추가 가능합니다. 화자는 어쩌면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잃고 싶었는지 모른다고. 여기서 목적지를 단순한 행선지로 고정하지 말고 삶의 목적지로 확장해 나가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원래 나의 길을 찾아 되돌아가야 할지 이왕 이리된 바에야 더 나아가 새로운 길을 가야 할지 망설일 경우를 생각합니다. 우리네 삶이란 아주 작은 데서 분기점이 생길 때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게 현명할 경우도 가끔 있으니까요.

“내 모르는 새 지나친 정거장만큼 / 생을 훌쩍 건너뛸 수는 없을까”

이 시행에 이르면 어쩌면 화자가 일부러 내릴 정거장을 지나쳤을지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이 듭니다. ‘다리는 무겁고 눈꺼풀은 저절로 감기고’란 시행에서 현재 화자 삶의 행로가 녹록지 않음이 드러나므로. 이럴 바에야 낯선 곳에 자신을 던지려 했지 않을까 하는.

“지나친 정거장만큼이나 무엇인가를 / 잃어버렸다는 자각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가끔 내가 걸어가는 길에서 이전 삶을 지우고 싶은 생각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내릴 곳을 모른 체 지나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런 마음도 있었겠지요. 뭐 새로운 곳이라도 별 수 있겠어하며 스쳐 지나간 정거장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다음 행선지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서 내릴지”

현대인의 삶의 모습이 잘 드러난 시행입니다. 현실의 삶이 팍팍하여 벗어나고 싶은데 막상 벗어나려 하니 그 낯섦이 두려워 도전을 꺼리는. 그래도 내려야 할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사람은 다행입니다. 내가 내려야 할 정거장은 어디인가 고민한다면 더욱 다행이고.
허나 꼭 내려야 할 정거장이 과연 있는 것일까? 내 삶의 목적지를 잃은 채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냥 몽롱하게 지나치고, 차창에 어룽대는 자신의 모습마저도 낯선 얼굴이 돼 보이는 현실이 더 많을 테니까요.

오늘도 내려야 할 정거장을 어정쩡 지나치고 싶은 분들에게 이 시가 참 와닿을 듯. 조금 더 나아가 나도 모르게 지나친 정거장만큼 생을 훌쩍 건너뛸 수 없을까 고민한다면 철학의 언저리를 밟았을 듯.
이래저래 시 한 편이 생각거리를 만듭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목우씨의 산골일기(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