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368)

제368편 : 심재휘 시인의 '옛사랑'

@. 오늘은 심재휘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옛사랑
심재휘

도마 위의 양파 반 토막이
그날의 칼날보다 무서운 빈집을
봄날 내내 견디고 있다

그토록 맵자고 맹세하던 마음의 즙이
겹겹이 쌓인 껍질의 날들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마르고 있다
- [중국인 맹인안마사](2014년)

#. 심재휘 시인(1963년생) :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1997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현재 대진대 문예콘텐츠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함께 나누기>

시골로 옮기고 난 뒤 지난 이십 년 동안 밭작물도 다양하게 심었습니다. 아마 도시 사신다면 이름 대면 모르는 작물도 꽤 될 겁니다. 아마란스. 스테비아, 금화규, 삼채, 아스파라거스, 모닝글로리, 적하수오, 여주, 더덕...
그 이십 년 동안 고추, 가지, 오이, 토마토와 계속 심었고, 고구마 감자에 이어 양파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양파를 심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된장에 찍어 먹는 맛이 좋기 때문에. 그래서 식당에 가도 양파가 나오면 괜히 기분 좋습니다.

오늘 시는 짧지만 아주 야무집니다. 워낙 구성이 탄탄해 생각거리를 많이 줍니다.

사랑 대신 '옛사랑'이란 시어를 잠시 음미해 봅니다. ‘옛’이 붙었으니 과거형입니다. 지나간 사랑 얘기란 말이지요. 허나 ‘옛’이 붙긴 하지만 지나갔다고 완전히 끝난 사랑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는 과거형이지만 심리적으로는 현재진행형이니까요.
'첫사랑'이나 '중독된 사랑'처럼 정염을 끓어오르게 하지 않지만 영화에서나 드라마에서 비슷한 류의 사랑 얘기를 들으면 마음만은 다시 열띤 사랑의 주인공이 됩니다. 왜냐면 사랑의 기억은 갈수록 희미해져도 몸과 마음에 새겨진 사랑의 감각은 생생히 남아 있기에.

그래서 옛사랑을 지나간 사랑이니 잊혀진 사랑이니 하고 내버려 둬도 다시 살아납니다. 잠시 잠잠할 뿐. 마치 꺼져 있는 불씨 자꾸 뒤적이면 불이 붙듯이. 언제든 부르는 소리 나면 자리를 박차고 팔딱 일어날 만큼 중독성도 강합니다. 그(그녀)를 생각하면 머리는 잊었다고 외치는데 몸은 아직 잊지 않았다고, 아니 잊을 수 없다고...

“도마 위의 양파 반 토막이 / 그날의 칼날보다 무서운 빈집을 / 봄날 내내 견디고 있다”

도마 위에 양파가 칼날에 반쪽으로 잘리듯이 나의 사랑도 반쪽으로 잘렸습니다. 그 반쪽으로 잘린 사랑이 참 안쓰럽습니다. 한때는 한 몸이었으나 지금은 반 토막으로 남은 양파처럼 사랑은 예리한 칼날로 잘려 아련함 대신 아린 맛만 남았습니다.

“그토록 맵자고 맹세하던 마음의 즙이 / 겹겹이 쌓인 껍질의 날들 사이에서 / 어쩔 수 없이 마르고 있다”

사랑은 양파의 겉과 속처럼 두 가지 속성을 지닙니다. 주황빛 얇은 반투명 막을 벗기고 들어가면 이내 속이 보일 듯하건만, 한 겹 다시 또 한 겹... 벗기고 또 벗겨도 속내를 쉬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랑도 오래 묵으면 그렇게 되는지.
그토록 맵자고 맹세하던 마음의 즙이 마르고 있는 시간 속에 옛사랑만 남습니다. 정작 껍질을 벗기고 벗겨 봐도 손에 잡히는 것은 껍질뿐이지만. 아무리 미련이 많아도 아쉽지만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옛사랑은 허허로울 수밖에 없는가요.

남인수의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 하는 [애수의 소야곡]이 절로 흘러나옴직하고, 조금 젊으면 이문세의 [옛사랑]인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를 읊조릴 만도 한데, 옛사랑 떠오르지 않는 이는 어떡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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