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로 너를 안았고, 집착으로 날 버렸다

사랑 다섯 스푼, 집착 두 스푼, 광기 한 스푼

by 삥이


민재가 죽었다.


몸속의 뜨거운 피를 분출하다 못해 뼛속까지 뱉어내어 말라죽었다. 왜 죽었냐 물어보니 담당의가 말하더군,


"저 환자 영양실조였어."


어이가 없었다, 삼겹살 10인분을 혼자 처먹던 저 돼지새끼가 영양실조라니.


"저 환자, 단 한 끼도 먹지 않았어. 음식을 거부하더군. 거부.. 거부라는 말보단 '음식을 공격하려고 하듯이' 내치더군.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말이야."




1년 전,

민재는 서울의 잘 나가던 개원의(開院醫)였다. 철없던 시절, 나와 함께 청춘을 질주했지만 그 친구는 잘난 부모덕에 꽤나 승승장구했었지. 그래도 그 친구를 싫어한 적은 없었다. 내 오랜 벗(友)이기에.





9개월 전,

우리는 서로 2:2 미팅을 가졌다. 대학교 선배가 그 친구와 나를 위해 클럽에서 데려와 준 어느 연상의 여인네 둘. 둘 중 한 명은 굉장히 고혹적인 분이었다. '민재 녀석이 먼저 찜하겠군.'.


내 친구는 예쁜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 결국 그녀는 민재가 채갔고, 나는 남은 한 명과 잘 되진 못했다. 관심이 가진 않았으니.


어떻게 보면, 민재가 또 내게 승리했다. 그래도 그 친구를 싫어한 적은 없었다. 내 오랜 과정이기에.


우리는 종종 만나 삼자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놀이공원도 가고, 술도 마시고, 물론 밤에는 내가 피해 줘야만 했다.


우리는 셋이 잘 맞았고, 자주 만났고, 잘 놀았다.

그래도 때로 짜증은 났다. 그래도 그녀를 싫어한 적은 없었다. 내 친구의 연(戀)이기에.





3개월 전..이었던가,


어느 날은 민재의 여자친구가 나를 따로 호출했다.


"오늘 저녁에 바빠?"

"아니, 무슨 일 있어?"

"그건 아니고.. 할 얘기가 있어"


그녀와 나는 집 앞 공원에 앉았고,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를 마시며 거창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가볍지 만은 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열 캔쯤..


그녀가 내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녀 속 깊숙이 담아 놓았던 말들, 조금은 역겨운 말들.


"있잖아, 민재가 성 도착증이 너무 심해."

"무슨 말이야?"

"나도 그와의 사랑은 늘 좋았어. 일할 때도 안달이 났더라니까? 처음엔 그게 민재의 기술이고, 나를 사랑하는 크기인 줄 알았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게 점점 더 다른 걸 요구했고, 어제는 나와 내 친구랑 같이 사랑을 나누면 어떻겠냐 묻더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눈 하나 안 깜빡이고, 사랑하는 나를 두고, 어떻게 내 친구의 이름을 들먹일 수 있느냐구..! 너무 미워. 너무 미워서 눈물이 나."


역겨웠다.

그리고 며칠 뒤,


마치 오후 6시면 해가 지기 시작하듯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너무나도 완곡하게 그녀는 민재에게 이별을 통보했고,

무자비하리 만큼 연락은 단 순간에 끊어졌다.


민재는 그 뒤로 미쳤다. 성욕을 해결할 방도가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일까, 사랑에 대한 아쉬움일까.


역겨운 새끼.


나는 요즘, 민재의 이별 소식을 듣고 며칠 전 밤에 공원에서 맡았던 썩은 향기 같은 것이 나는 듯한 요즘을 보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민재는 끝내 이별을 극복하지 못했고, 10대 소년의 어리석은 '첫사랑'처럼 이별하나 극복하지 못해 오늘이 되었다. 그렇게 죽었다.


나는,

그 역겨운 새끼를 위해 이렇게 글을 쓴다.


글을 쓰고, 어딘가에 올리고 난 뒤에는 나도 민재를 따라가려고 한다.


역겨운 새끼,

썩은 향기를 둘러싼 계집,

너 덕에 울음으로 발효된 내 삶이 무너졌다고.


민재를 빼앗아간 것도 참았는데, 요구 하나 들어주지 못하고, 끝내 이 사달을 만든 천하의 찢어 죽일 년.


그래,

민재도, 너도, 나도 다 죽는 거야.





사랑은 그렇게 적절한 광기를 머금고, 집착을 표현하며, 다시 사랑으로 감싸 안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죄로, 나는 너를 무너뜨렸다>로 끝나면 비극이나 <사랑이라는 찬란함을 안고 나는 너를 품으련다>로 끝나면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속 역겨움'이 '마음속 몽글몽글함'으로 바뀌어있겠지.


집착은 광기지만, 광기는 '애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끝내 품고, 심장의 심연 속에서 '나는 네 전부였노라, 나는 네 모든 것이었노라'라며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내라면 그것은 미친 게 아닌 살고 싶은 자의 절규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

집착은 파괴가 아니라 보호고,

광기는 파멸이 아니라 간절함의 다른 옷이다.


그러나,

집착은 파괴고,

광기는 파멸이다.


저자의 브런치 세 번째 작품 <행복은 웃지 않고, 불행은 울지 않는다> 속 '행복'과 '불행'의 편견을 해체해 모든 서사를 담아낸 존재만이 진정한 행복을 품을 수 있다고 말하였듯이 사랑 속에 집착과 광기가 빠진다면 그것은 영혼이 빠진 감정 놀음에 그치지 않겠지.


사랑은 설렘이고,

끝나면 옅어진다.


집착은 파괴고,

깊어지면 호러가 된다.


광기는 파멸이고,

미친 자는 폭력이다.


이 모든 것은 비극으로 끝난다.


하지만,

사랑을 해 설렘을 느껴, 설렘이 옅어질 때쯤 집착을 한 자는 여운을 느끼고, 여운을 느끼던 자가 보호하겠노라 세상을 향해 광기 어린 시선을 쏘아붙일 때.


우린 그런 사내를 보고 세 글자라고 부른다.


"아버지".


나도 당신 같은 사내가 되어 어느 여인네를 위해 찢어져 죽듯이 살고 싶어요.


제 연(戀)에는 사랑 다섯 스푼, 집착 두 스푼, 광기 한 스푼만 담아낼게요. 나머지 두 스푼은 아버지가 알려주세요.


아, 어버이날이었다. 헤헤헤헤


1.jpg 2025년 5월 8일, 오후 10시 58분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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