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대를 걷는 살아있는 자

그리고 기도를 통해 불멸이되는 죽은 자.

by 삥이



"아 현타 왔어"

"그냥 웃김"

"몰?루, 걍"


말은 짧아지고, 감정은 말끝에 걸쳐 놓은 이모지처럼 흐려진다. 속도는 빨라지고, 표정은 사라지고, 숫자만이 남는다.


기업을 꿈꾸던 이들은 줄어들고,

숫자를 좇는 상인들이 더 많아졌다.



<마음이 죽은 사람들에게, 가사 없는 음악(Playlist)>


그날 나는 그 문장을 보았다.


그리고 알았다.

감정의 구조가 무너진 자들이 찾는 음악은, 말이 없는 음악이구나.


나는 그런 죽은 감정의 바다를 건너보았다.

그 바다 아래, 여전히 나는 나였다.





당신을 익사시키고 싶었다.


지식을 전파했던 사람으로서,

미디어 속 00님으로 불렸던 아이로서,

SNS 속에서 어쩔 때는 여인들의 관심을 즐기던 자로서,


멍청이로서,

외로운 존재로서,

누군가의 통증에 함께 아파하고 우는 존재로서,


하여 가득 찬 삶을 살아보던 내게 어떤 이들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 좋아해'라는 내면의 부재 혹은 복잡함에 대한 외면이란 가면을 쓴 채로 나를 품으려다 익사하고는 하였다.


하지만 그 말은 나를 향한 게 아니었다.

그건 스스로의 편견에 부딪혀 무너진 소리였다.


그래도 나는 곁에 섰다.

구원이었을까?


개소리,

나는 신이 아니다.


다만, 손을 내밀고 싶었을 뿐이다.



숨이 막히는 줄 았았는데, 깊은 바닷 속도 알고 보니 숨이 쉬어져.



행복=기쁨, 좋아

불행=슬픔, 싫어


라는 공리 속에 갇혀 살지 말고, 살아있음을 느껴보며, 나랑 함께 걸어보자는.. 어찌 보면 제안이었다. 예쁜 말로는 "손 내밈."





돈이 밉고,

사람은 사랑해.


어느 날 어떤 이들을 보니

사유가 얕은 이는 돈을 사랑하는 듯싶고,

사유가 깊은 이는 돈을 미워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돈과 명예는 깊은 자들을 향하곤 하더라지.


내 업계에서는

단 몇 줄의 선동,

단 몇 컷의 이미지,

그것으로 얕은 감정은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더라.





어릴 적, 나도 꿈이 있었다.


잠을 줄이며 광기를 품었고,

여인을 좇았고, 당겨짐을 즐겼으며,

동시에 명예를 탐했고, 지적 허영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내 삶이었다.

후회도, 자랑도 아닌 그저 겪음으로 남은 삶의 조각.





라면 하나 사 먹을 돈이 지갑에 없어도

마음만큼은 당신에게 이유 없이 치킨 세 마리를 시켜줄 수 있다는 여유로운 각오로 쓰는 매일의 글 그리고 텍스트.


이마저도 이유 없고,

그저 당신을 만나게 되었기에,

그리하여 내가 가득해졌기에 그렇다.


"삶은, 덧없다" 보단

"덧없는, 삶" 조차 재밌다 보니.





인생무상 (人生無常):


쳇,

나는 이런 위로보단 발버둥 치는 말이 좋아.




나만의 신을 만들어 보기


나는 나만의 신(神)을 만드는 삶을 살며, 사랑과 지식을 탐닉한다.


지식의 속엔 사랑이 있고, 사랑이라는 위대한 예찬 뒤에는 만물의 진리가 숨어있다는 것을 수많은 학자들이, 신이라 불렸던 그분들이 증명해주지 않았는가.


내 신은 부모님, 내 강아지 하지, 혹은 그 날 만난 친구, 혹은 내 미래의 어느 여인이 될 테지.


나는 그들을 위해 영원(蠑蚖)을 기도하고, 그들에게 불멸을 건넬 때, 그들은 비로소 신(God)이라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정도는 품고 산다.


그들에게 '보호'라는 내 품을 건네어,

행복이라는 감정을 품게 만들고,

동시에 불행이라는 감정 역시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닌 맞이하고픈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길 바래어 본다.


내 기도는 항상 내 신에게 향하고 있고,


내 목숨은 항상 내 신의 손에 쥐어져 있다.


괜찮아,

내가 더 고생해도 된단 말의 기저에 깔린 내 마음속은 사실 아래와 같기에.


난 어차피 안 우울하거든.

그런 일 겪어봤자, 그냥 좀 웃겨.


왜?

살잖아. 느끼잖아. 겪잖아. 그리고 다시 안아 줄 거잖아.


is 뭔들.


이 마저도 나다.


이 세계는 축복이고,

이 통증은 감각이고,

이 감각은 삶의 증거이니 '그냥 살래'라는 아주 가벼운 네 글자로 언제나 타인에게 내 꿈을 말할 수 있다.






오늘의 글에서는 철학자를 호출하던 버릇을 덜었고,

또 인문서를 인용하던 링크를 덜었으며,

또 눈물을 흘리는 척하면서 단어를 역설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한 가지인데,

깊은 바닷속에 빠져도 사실은 숨을 쉴 수 있었다는 그 감정과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흐른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이 삶이 얼마나 위대했던 것인지를 느껴보기를 바라는 내 작은 소망이 담겨있기에 그렇다.



때문에 내 글의 대부분은 항상 이렇게 마무리된다.


"어디쮸까"

"사랑해, 보고 싶어, 미치겠어"

"헤헤.. 반박 시 때립니댱"



무거울 필요도

가벼울 필요도

슬플 이유도

기쁠 이유도


그렇다고 어느 하나의 것을 탐할 이유도 없으며, 반대로 고행을 택할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중도의 길을 품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삶은, 그렇게 흐르고 나로 가득하게 채워지며, 그렇게 가득 채워진 나는 사랑을 빌어 내 신에게 기도하고, 내 신은 그렇게 영원이 되어 '선한 존재'로서 미래를 살아갈 테지.


내 기도를 받으셔서,

평생 살어. 당신으로 가득한 삶이 어쩌면 좋을 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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