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 수 없지.
살다 보면,
무표정한 얼굴보다,
웃는 얼굴이 더 아플 때도 있다.
"그거 진심이야 ㅎㅎ"
위 말은 두 가지 온도가 공존한다.
시리도록 아린 차가움과,
녹이도록 데이는 따스함.
하지만,
공존은 우연이고,
대부분은 어쩌면 '대립' 상태로 존재하고 있기도 한다.
더욱이 웃긴 것은,
'아리다'의 반대말은 사실 없다.
사전적으로 「아리다」라는 단어는 욱신거리거나 찌르는 듯한 아픔을 나타내므로, '괜찮다.', '편안하다' 등의 단어를 반대의 상황에서 사용해 볼 수 있겠으나, 더 정확하게는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다.
아린 감정의 반대가 사실 없다.
우린 언제나 아린 쪽에서, 그 반대를 꿈꿀 뿐이니까.
우리는 왜,
그렇게 웃으며 연기하듯,
진심을 말했을까?
<김사월 - 누군가에게>
우리는 늘 웃는다.
웃음이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도, 살다 보면 어쩌다 웃는 데 능숙해진다. 덤으로 '너스레'도 는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두 번째 만난 사람에게도,
간헐적으로 만난 사람에게도,
나를 안 좋게 본다는 걸 아는 사람에게도,
사실 내가 지금 미워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리고 또 사실 내가 지금 서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늘 '웃음'이라는 가면을 쓴 채,
그 뒤에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다.
감추는 게 꼭 '슬픔'만도 아니더라지.
분노, 짜증, 서운, 기대 등 다양한 감정이 있을 수도 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냥 아무 생각도 없는 '무덤덤' 상황일 수도 있고.
그런데 왜 연기하듯이 살아가게 될까?
"돈 벌고 살아야 하니까 ㅋㅋ" 는 아니겠지 설마.
방 문을 열고 나가서는,
아니 어쩌면 방 문을 열기 전 집안에서도.
사람들은 늘 '괜찮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버릇이 있다.
짜증나도 "아뇨~ 괜찮아요 ㅎㅎ"
무례해도 "ㅋㅋㅋ 선배님 너무하셔요~"
서운해도 "앗 ㅋㅋㅋ 뭐야 너 왤캐 진지해!"
그렇게 순간을 넘기고,
또 넘기고, 또 넘기고,
그러다 20대, 30대, 40대가 되고.
살다 보면
어느 날부터 내가 뭘 느끼는지 나도 모르게 된다.
알게 되더라도
그 표현이 마냥 어색한 때가 있다.
그게 사회생활이고,
그것이 성숙이며,
그것이 관계의 기술이라며 익혔다지.
전부일까?
우리가 익혔다는 그것이, 과연 다일까?
다시 묻자.
한쪽이 진심을 품었을 때, 괜히 장난처럼 말해야 하는 상황.
둘 다 진심을 품었을 때, 괜히 너스레를 떨며 말해야 하는 상황.
위 두 상황에서 우리는 왜 그게 '덜 아픈 방식'이라고 믿고 있는가.
하긴,
내가 알 수 없지.
감정은 늘 가면을 잘 쓰는 쪽이니.
인간에게 그런 기교쯤은 껌이니.
그것이 바로 너, 나, 우리이니까.
그래서 내가 알 수 없지.
필자가,
과거에 쓴 시가 있다.
헛소리를 써봤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더라지.
감정을 말하는 건 언제나 위험하다.
진심은 오해되기 쉬우니 말이다.
그래서 때때로 선택하는 전략은,
말 대신 웃음을 고르고, 표정 대신 이모티콘을 택하는 전략이다.
그렇게 가장 안전한 선택들을 반복하고 나면,
정작 내 감정이 어디 있었는지도 흐릿해지고,
어느 날에야,
문득 아린 감정을 호출하게 되는 것일지도.
웃음이 가면이라고 한다지만
기쁨이 웃음의 모양만 닮은 게 아니듯,
슬픔이 꼭 눈물로만 흐르지 않듯이,
진심도 꼭
어떠한 형태를
정해진 말의 모양을 갖추지 않아도
진심으로 닿을 수 있지 않을까.
말이 진심이라는 증거는,
말투가 아니라,
그 말이 누구에게 향했는가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가끔은 웃으며 건네는
진심이라는 것들이 있다.
어쩌면,
웃음은,
방어가 아니라,
그 진심이 너무 뜨거워서,
덜 데이게 하기 위한 포장지였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포장지 두께 삼메다 팔십구센티메다 ㅋㅋ)
사람은 살면서, 때로는 그런 날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이미 상처를 피하기 위한 모양을 먼저 만드는 순간이요.
독자님들도 그런 적이 있으셨을까요.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순간이 <너무 오래된 일상>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감정은 늘 지나간 뒤에야 알 수 있었고,
진심은 왜 늘 말끝에 가서야 울컥거리는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알고, 깨달은 것이 너무도 부족한가 봐요.
「아리다」의 반대말이 없다고 하더군요.
혹시 그 단어가,
애초에 '긍정'이라는 기운을 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거부당해서 아리다" 일 수도 있지만,
"품었기에 동시에 아리다" 일 수도 있는 것처럼요.
오늘의 글은 그러한 물음 아래에,
그렇게 써보았습니다.
- 여전히 잘 웃으며 살아가는 어느 브런치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