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은 그냥 '응'이었는데

그냥 듣고 있었을 뿐인데,

by 삥이


제 인생에서 공짜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어요.

어제 값을 치른 대가를 오늘 받고,

내일 받을 대가를 위해 오늘 먼저 값을 치릅니다.

인생은 선불이에요. 후불은 없어요.

- 손흥민 -



나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니까 좋은 사람이 오더라.

- 이효리 -



진짜 좋아하면 자동적으로 행하지 않나요?

진짜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나가서 먹을 거 아니에요.

자신의 단점들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쳐 나가면 절망을 안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력하는 자는 그것 자체가 재능이니까요.

- 타블로 -



1.png 손흥민, 이효리, 타블로(이선웅)






SNS 속 출판사 계정, 작가 계정,

어쩌면 무명의 창작자까지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좋은 말'을 남긴다.


너무 좋아서,

너무 진실해서,

너무 감동적이어서.


..라고는 하는데,

사실은 무심히 넘기고,

좋아요 한 번 누르고,

그다음 장으로 스와이핑 하는 걸로 끝이다.



왜일까.


왜 우리는 어떤 말에는 뜨겁게 반응하고, 어떤 말은 지나치게 식은 채로 소비할까.





<오늘의 BGM>






1. 우리는 왜 반응하는가





사람은 꽤나 솔직한 동물이기도 해서,

굉장히 섹시한 남성/여성을 보는 순간

자기 자신도 모르게 아주 잠시동안은

그 사람을 향해 눈 길을 쏘고는 한다.


하지만 그 눈 길이

"저기.. 번호 좀.."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냥 봤을 뿐이지,

마음에 들어온 건 아니기에.



우리는 종종 타인의 말에 반응하기도 하고,

혹은 같은 말이어도 '외면'하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말에 반응하는 것은

'그 말을 하는 사람' 때문일까,

혹은 그 사람이 '말하는 내용' 때문일까.



아무래도 두 가지가 모두 공존할 것이다.



내가

"담배 피우지 마세요"라고 한 마디 내뱉는 것보다,


실제 의사가

"담배 피우지 마세요"라고 내뱉는 것이 조금 더 울림이 큰 법.



말은 그 자체로 울리기 힘든 법이다.

말을 듣는 내 마음, 내 상황, 내 감정이

울리기를 '허락'할 때만 울리는 법이지.




그래서 우리는 울림 없는 말들을 반복해서 소비하고,


결국 "사람보다 말이 많은 시대" 속에서 오히려 '진짜 사람'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살면서 만나본 사람 중 대다수가 다 자기 자랑만 해요. 자기가 뭘 잘하고, 뭘 가졌다면서. 가르치려고 들죠. 하지만 정말 울림을 주는 사람은 평생에 한 번 만날까말까였어요. 그분은 같이 가보자고 말씀해 주시더군요."

- 이효리 -


2.png 기억 잘 안나서 각색했음. / ⓒ 이효리 디지털 싱글 [후디에 반바지] � Concept Photo Ver. 1





그녀가 말하더군.


살면서 정말 울림을 주는 사람은 평생에 한 명, 혹은 없을 수도 있다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말들 속에 살고 있을까.


그리고 그 말들 중,

우리를 실제로 움직인 말은 몇 개나 될까.










2.


그: 나는 여러 사람들이랑 대화를 많이 하니까 대화 레인지가 커지는데 날 고민하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대화는 거의 못하니까. 그런 친구도 많진 않고 잘 보기 어렵지.


나: 그래도, 너무 멋있으세요. 뎡말.





프랑스 공화국의 철학자였던 폴 리쾨르(Paul Ricœur, 1913~2005년)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자아는 그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되는 것이다."

(Le soi n’est pas quelque chose que l’on découvre, mais plutôt quelque chose que l’on raconte.)



나는 이 말을 오래간 붙들고 있었던 때가 있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정체성이라는 것조차 '말하기'를 통해 구성된다는 선언이었을 것이다.


즉,

내가 어떤 말을 듣고, 어떤 말에 울리고,

어떤 말은 흘려보냈는지에 따라 나는 달라진다는 의미겠지.



하지만 폴 리쾨르는

위대한 성현(聖賢) 답게 여기서

나를 또 비틀어버린다.


그는 '이야기된 자아''이해하는 자아'를 또 구분한다.



그가 말하는 '이야기된 나'는 내가 말로 재현한 나를 의미하며,

그가 말하는 '이해하는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의미를 부여하는 나를 의미한다.



즉,

나는 말하면서도,

동시에 내 말을 해석하는 해석자로 머무른다는 이야기인 듯싶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나'라는 존재는 말을 내뱉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말을 스스로 듣는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의미.


표현하는 존재이자, 듣는 존재.




그래서일까,

아무래도 '우리'라는 사람은

어떤 말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어떤 말 앞에서는 되려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또 어떤 말을 들을 때는 내가 왜 계속 브런치에 로그인하며 키보드를 잡는지.



그 말이 '진짜라서'일 수도 있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는 내가 그 순간 '진짜였기'때문이었을지는 않을지.


그 말은 내 안에 이미 있었던 물음을

다시 말할 수 있게 해 준 언어였지는 않았을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말은 선물이라기보다, '거울'에 가깝다.

거기에 내가 있고, 없고를 비추는.


좋은 말은 많다.

그런데 좋은 말이 곧 울림으로 다가오지 못한다.




그래서 과거에 썼었지.


"슬픔을 진단하지 않은 채 해열제를 쥐여주는 처방이지는 않았을까?"라는 물음을 던졌던, 브런치 제62번째 작품.




나는 감히

의사나 작가는 못 되는

일개 기획자에 그치기에,

처방하지는 못한다.


대신

듣는 건 잘한다.


아니,

그것을 좋아한다.

꽤 많이.




울림은 말의 질이 아니라,

그 말을 허락하는 내 감정의 깊이에 달려 있다.





살다 보니 나는 그렇게 살고 있더라.


나에게 돌아오는 말,

나를 다시 말하게 만드는 말,


그리고

내가 울리기를 허락한 말을 기억하려 살고 있더라.



그것이야말로,

폴 리쾨르가 말한

"이야기된 나"와 "이해된 나" 사이의 진짜 접점이 아닐까.








그분의 말씀은

단순한 토로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 자체로 철학적 물음으로 존재한다.


'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언어.'


그래서 탄생했다.


『감정은 허락받아야 할 일인가요, 작가님』까지 이어진 65개의 이야기.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이는,

한국말을 하면서 동시에 신의 형상을 갖춘,

정말 '사람'의 감각을 제대로 쓴 채로 존재하더군.





그건,

결국,

작가의 말이었더이다.









3. 어떤 말은 그렇더라





어떤 말은 '좋은 말'이고,

어떤 말은 '울리는 말'로 남는다.


여기서 위 두 '말'은 같지 않다.


내가 써놓고 봐도 같지 않다.

당신이 읽어도 같지 않을 것이다.


글자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아무튼 간에,

글자수가 다른 위 두 말은

'마음에 남는 여운'이 전혀 다르다는 것으로 차이가 발생한다.



어떤 말은 '정보'로만 지나가고,

어떤 말은 '기억'으로 남는 것처럼.



그래서 2020년대의 대기업들이,

'스펙 나열형' 광고보다는

'감정 서사형' 메시지에 더욱 많은 시간을 할애하듯이



기술의 정점에 오른 시대에서

외려 말의 울림을 찾기에 혈안인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예컨대,

"가성비 최고!"라는 어느 구멍가게의 광고 메시지보다,

"Think Different"라는 Apple의 문장 하나가 세상을 지배했듯이.



혹은,

"업계 최초"라는 어느 문구보다,

"Chanel N°5. You know me and you don't."라는 CHANEL의 말이 여성들을 움직였듯이.




울리는 말은,

좋다는 판단을 넘어서

'들었다'는 감각을 남기기도 한다.




마음에 '탁',

하고 닿은 어떤 문장.




그건 내용이 아니라,

문장의 리듬과 말의 배려에서 오는 울림이지 않을까.











좋은 말은 사려 깊은 말이고,

울리는 말은 사려 깊은 말이 '닿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울리는 것은 문장이 아니라,

그 말에 실린 '의도'의 농도일지도 모르겠다.




왜,

그렇지 않은가.




좋은 말로도 남을 상처 줄 수 있고,

무심한 말이었는데 그게 누군가에겐 구원일 수도 있다.




"예뻐요"라는 말을 누군가가 했을 때는

그저 예의일 수 있는데,


다른 누군가가 그 말을 했을 땐

그날 하루를 바꾸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때는 그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말을 했기 때문이다.


말에는 언제나 발화자가 따라붙는다.

그러니 어떤 말은, 누가 했는가에 따라 구조가 바뀌는 것이지.





그 말은 특별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응"이었고,

혹은 "알겠어"였고,

가끔은 "왜?"였으며,

또 어느 때는 "몰라"였다.



우리 엄마의 "왜?"에는 걱정이,

당신의 "왜?"에는 호기심이,

의뢰인의 "왜?"에는 의심이 담기듯.



말에는 언제나 발화자가 따라붙는다.

그러니 어떤 말은, 누가 했는가에 따라 구조가 바뀌는 것이지.



그러니까,

작가의 말은 언제나

'울리는 말'로서 다가오는 법이지.








밝혀짐.gif




나는 기획자라서

그 말이 어디로 흐를지까지 계산해야 하고,


울리는 말을 위해,

좋은 말의 리허설을 여러 번 통과한 말을 쓰는데,



어떤 이는

그저 내뱉은 말 하나로,

큰 울림을 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저 "응",

혹은 "알겠어",

가끔의 "왜?",

어느 때의 "몰라"라는 말을 듣는 내가

이미 상당히 '듣는 자세'였기 때문에 울림을 얻었을지 않았을까.











왜 우리는 어떤 말에는 뜨겁게 반응하고, 어떤 말은 지나치게 식은 채로 소비할까.




결국,

자세였지 않을까.








안녕하세요,

오늘과 비슷한 물음을 던졌던 비슷한 이야기도 소개해드려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늘 좋은 시간 속에서, 행복하세요.


- @삥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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