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무너진 뒤에도 남아 있는 손 한 쌍의 기록
버려진 날의 밝음이 오래 남아 있었고
세상은 먼저 주저앉은 뒤 인간의 심장이 늦게야 따라 꺼졌으며,
지켜야 할 무엇 하나가 있어 길은 다시 열렸으매,
사라지지 않는 죄 위에서도 생은 누군가에게 이어져야 했다.
[1장]
도시는 아침부터 지나치게 조용했다.
늘 그렇듯, 조용함이 먼저 찾아오고 사건은 나중에 따라왔다.
사람들은 이상한 기척에 예민해졌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불안해하는 시기였다.
나는 천천히 골목길을 걸었다.
한때 의약품 광고가 붙어 있던 간판은 반쯤 찢겨 나가,
이제는 어떤 문구였는지조차 읽을 수 없었고,
편의점 앞 유리문에는
며칠 전의 비바람이 남긴 먼지 얼룩이 마치 거대한 손자국처럼 번져 있었다.
그러나 이 낡음과 공백이 '이상한 것'이라는 감각처럼 느껴지던 때는 애진작 지났다.
요즈음의 사람들은
무엇이 비정상적이고,
무엇이 원래부터 그러하였는지
구분하려는 의지도 잃어버린 듯 보였다.
나는 길을 걷다가
약국 앞에서 걸음을 멈춰보았다.
이 골목에서 거진 유일하게
밤마다 불빛이 남아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난주부터 문은 굳게 닫혔고,
철제 셔터는 반쯤 내려온 채로 위태롭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누가 문을 닫은 건지,
왜 닫았는지,
그러한 비하인드는 알고 싶진 않았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 도시에서 사라지는 것들에 질문을 걸지 않았다.
사라지는 데에는
항상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라는 말만 남겼다.
그때였다.
약국 입구 쪽에서 작은 움직임 하나가 보였다.
처음에는 '뭐시여..?' 싶었고,
종이쪼가리나 쓰레기봉지 같은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조심스레 흔들렸다.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저기요.. 아저씨.."
그제야 그것이 '어린아이'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몸집의 아이가
문 앞 그림자에 기대어 있었다.
얼굴 한쪽은 햇빛에,
나머지 한쪽은 셔터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숨을 고르고 있는 듯했으나,
그 숨이 너무 작아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보였다.
아이는 나를 겨우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이 문이 안 열려요..(!!)"
나는 문고리를 당겨봤다.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가끔 사람이 떠나면 이렇듯
문이 스스로 굳어지는 것 같았다.
"비어 있어. 안에 아무도 없어."
아이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배고픔 때문인지,
혹은 체념 때문인지,
전혀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대강 유추는 해볼 수 있었다.
나는 주변을 살폈다.
사람이 한 명쯤 지나갈 법한 시간임에도 아무도 없었다.
바람도, 자동차 소리도.
모든 것이 과하게 조용했다.
"집은 어디야?"
".. 없어요."
"누구랑 있었니?"
".. 아무도요."
아이는 대답하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치 대답이라는 행위가
스스로에게 죄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주머니에서 작은 물병 하나를 꺼냈다.
아이의 시선이 그것에 꽂혔다.
그러나 손을 뻗지 못하고,
오히려 뒤로 움찔했다.
살아남아온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선뜻 받으면 안 된다'는 식의 경계.
'대가를 물어야 한다'는 식의 의심.
그리고 그런 의심이 너무 일찍 몸에 밴 아이였다.
"마셔도 돼~ㅎㅎ"
아이의 손이 물병을 받아 들었다.
뚜껑을 돌리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아주 작은 들숨과 함께
물이 목으로 넘겨졌다.
아이의 어깨가 잠시 내려갔다.
그 작은 숨 하나가
이 낯선 골목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제 어디로 향할 셈이야?"
"모르겠어요"
"그럼, 일단 아저씨랑 같이 갈래?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줘"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도와주세요..?"
나는 아이를 바라보며 대답을 망설였다.
정확히는,
그 이유, 그 약속 내용을
제대로 설명하기에는 나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뒤에야 입을 떼어보았다.
"나도 잘 모르겠단다. 그래도 일단은 살아야지."
아이의 눈이 아주 작게, 하지만 분명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
골목 멀리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바람 같기도,
부러지는 나뭇가지 같기도 한 소리.
아이는 움찔하며 물병을 꼭 쥐었다.
나는 아이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괜찮아, 일단 가자."
아이도 더 묻지 않았다.
이 거리에서 살아남는 법을 꼭 배워야만 했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사람하나 없는 아침의 도시를 걸어 어디론가 향했다.
나는 아직 모른다.
이 아이를 데려가는 일이
내 삶의 남은 부분을 전부 바꿔버릴지,
아니면 단지 오늘 하루를 붙잡아줄지.
하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버려진 날의 밝음은
그날도 오래 남아 있었다.
[2장]
아이는 작은 물병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마치 그 온기가 이제 막 시작된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열기라도 되는 듯이..
우리는 말없이 골목을 빠져나왔다.
아침 햇빛은 희미했고,
늘상 그러하였듯이 구름은 얕게 깔려 있어
도시 전체를 천천히 누르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의 걸음에 맞춰 속도를 늦추었다.
아이의 보폭은 작아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주저함이 섞여 있었다.
"밤엔 어디 있었어?"
아이는 대답을 고민했다.
하지만 나는 대답을 강요하진 않았다.
이 세계에서는 궁금한 것을 묻는 행위가 상대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과 비슷할 때가 많았다.
우리는 골목 끝을 벗어나
큰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 길 역시 비어 있었다.
아스팔트 위엔 바람만 지나가고
길가에 쓰러진 배달 오토바이는
번호판이 반쯤 뜯겨 있었으며,
상점 유리문에는
<임시 휴업>이라는 종이쪽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 사람들.. 다 어디 갔어요?"
아이가 아주 조심스레 물었다.
그 질문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음.. 글쎄."
진실을 말하면
아이의 얼굴이 더 창백해질 것 같았기에
나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아이의 눈동자가
빈 거리 위를 천천히 훑었다.
무언가 찾는 듯,
또 무언가 잃어버린 듯.
그때였다.
멀리, 건물 모퉁이 너머에서
작게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손이 즉시 내 옷깃을 잡았다.
그 반사적인 움직임이
밤마다 혼자 떨며 견뎌온 시간들을 그대로 말해줬다.
나는 아이를 내 뒤로 살짝 숨겼다.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그게 사람인지,
바람에 밀린 물건인지,
아니면 그 밖의 무언가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아이의 목소리가
바람보다 작은 소리로 새어 나왔다.
"이 소리, 어젯밤에도 들었어요."
"어디서?"
"저쪽 큰 도로 근처에서요.. 계속 누가 움직이는 것처럼.."
나는 아이의 말에 미세하게 목이 굳어졌다.
아이가 말하는 '누가'라는 지칭은 그 대상이 사람일 수도 있고,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요즈음은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그래도 가까이 가진 않았지?"
아이는 내 물음에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그때 길 한복판에 떨어진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겉면엔 '생수'라고 적혀 있었지만
상자는 반쯤 찢어져 있었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
"누가 여기서 물을 챙겨갔나 봐"
"제가 가지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그 말이 아이의 지난 며칠을 전부 말해주었다.
굶주림, 두려움, 경계, 그리고 죄 아닌 죄를 짊어지는 어린 마음.
나는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주었다.
우리는 다시 걸었다.
아이는 내 옆에서
자기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는 듯
살며시 발을 옮겼다.
그때
하늘을 배경으로
까마귀 몇 마리가 움직였다.
날갯짓 소리도 없이
검은 점처럼 도시 위를 떠돌았다.
이상하게
저 까마귀들도
이 도시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저씨~.."
아이가 낮게 부르는 소리.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약속은 아직 지키는 거죠?"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응. 우리는 아직 그 약속 시작도 안 했어."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아주 작은 불안이 일었다.
우리가 지나온 골목에서
아까 들렸던 드르륵 소리가
없는 듯,
그러나 뚜렷하게
한 번 더 울렸다.
마치 누군가,
아니면 무엇인가가
거리의 냄새를 맡으며
우리를 따라오는 것처럼.
[3장]
아이는 내 손목을 가볍게 잡은 채로 걷고 있었다.
초조함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체온을 확인하고 싶은 듯한 힘이었다.
아이와 나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도시의 아침은 여전히 너무 고요했고
그 고요가 귀를 압박하는 듯하여
오히려 작은 소리들조차 크게 들렸다.
한창 출근길을 걸을 때,
의도치 않게 새벽 5-6시 즈음에 길을 나설 때,
약국 아저씨가 셔터 문을 올리던 소리,
호빵을 게시하던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생의 분주한 소리,
길거리 흩어진 담배꽁초 등을 쓸던 미화원 선생님들의 빗자루 소리가 크게 날 때처럼.
"저기 저쪽으로 가면 안 돼요!"
아이가 갑자기 내 옷깃을 세게 당겼다.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도로가 살짝 꺾이는 모퉁이 근처의 건물.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오래된 미용실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얼굴은 금세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젯밤에 저쪽에서.."
아이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몸이 기억하는 공포는 말보다 먼저 입을 닫게 하는 법이다.
나는 아이를 진정시키려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괜찮아. 우리는 돌아갈 거야."
그렇게 돌아가려 한 순간이었다.
작고 가벼운데,
분명 안쪽에서 나는 소리.
문 손잡이가 흔들리는 소리였다.
아이가 내 뒤로 바짝 숨어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 신발이 바닥에 마찰을 일으키지 않도록
발 끝으로 무게를 실었다.
그리고,
아주 느린 속도로
그 문틈이 조금,
정말 조금 열렸다.
완전히 열린 것도 아니었다.
빛이 스쳐 빠져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안쪽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문틈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물.. 있어요..?"
목소리는 갈라졌고,
너무 오랫동안 말하지 않은 사람의 울임이 있었다.
아이는 내 옷을 더 세게 잡았다.
나는 문을 노려보았다.
문틈의 주인은 마치
'물'이라는 단어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문 너머에서 다시 속삭여댔다.
"물 좀.. 제발 물 좀.. 물이요.."
굶주린 인간의 목소리.
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그 목소리에는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 떨림,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건조한 리듬이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
내 허리춤에 찔러 넣어둔 접이식 칼을 쥐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혹시 모를 상황의 대비였다.
하지만 옮기기엔 확신이 없었다.
단지 경계의 각도만 올린 채 문틈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이 조금 더 벌어지며 안쪽에서 어둑한 팔 하나가 나왔다.
조금 이상한 각도의 움직임,
일정하면서도 기괴한 움직임,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듯한 움직임.
그리고 냄새가 났다.
물도, 피도 아닌 > 썩어가는 먼지 냄새 < 였다. 그 냄새 속에 오래된 습기와 탁한 기운이 질척하게 섞여 있는 듯했다.
그 순간,
문 안에서 무언가가 '탁'하고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천장에 매달렸던 형광등 하나가 출렁이며 흔들렸다.
그 소리가 계기였는지,
문틈의 팔이 급격히 위로 들렸다.
그리고,
문 전체가 흔들릴 만큼
안쪽에서 큰 충돌음이 울렸다.
아이가 내 팔을 잡았다.
아니, 거의 매달리다시피 했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짧게 말했다.
"뛰자."
그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그대로 골목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 쿵, <
> 쿵, <
> 쿵! <
문이 안에서 밀려나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도시는 여전히 조용했지만
이상하게 그 조용함보다
저 '쿵'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아이의 숨이 가쁘게 흔들렸고
나는 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강하게 잡았다.
그러나 뒤에서 들려오는
마지막 '쿵' 소리 하나가
웅웅 울리며 도로를 떠다녔다.
마치
그 안에 갇힌 세계가
우리의 냄새를 찾아
처음으로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4장]
도망치듯 벗어난 골목 끝에서 나는 멈춰 선 채 숨을 골랐다.
아이는 내 품 안에서 작게 떨고 있었다.
숨이 차서가 아니라,
쫓아왔던 '그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붙어 있는 듯한 떨림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뛰쳐나온 건물은 조용했다.
조용하기엔 지나치게 차분했다.
마치 그 안에서 벌어졌던 모든 기척이 우리가 도망침과 동시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스스로 접힌 것처럼.
그러나 눈을 감으면
문틈 사이로 흔들리던 팔,
각이 뒤틀린 움직임,
썩어가는 냄새,
그리고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말을 '흉내 내는' 듯했던 그 떨림이 아직도 선명했다.
아이가 내 옷깃을 더 세게 붙잡았다.
"아저씨.. 그거.. 또 오겠죠..?"
나는 아이를 떼어내어 얼굴을 마주 보고 말했다.
"괜찮아. 조금만 더 가면 돼."
위로라기엔 너무 얇은 문장이었지만
이 도시에서는 그런 문장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아이 손을 잡은 채
더 깊숙한 골목으로 향했다.
도시의 중심부였던 곳조차
지금은 흉내만 남은 미로 같았다.
바람, 먼지, 비어 있는 간판,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떨어져 나간 듯한 시간의 잔해들.
얼마나 걸었을까.
삼거리 끝에 작은 학원 건물이 하나 나타났다.
'영어'인지 '수학'인지도 알 수 없는 바랜 간판.
꺼진 CCTV 카메라는 바람에 부러졌는지 옆으로 축 처져 있었다.
아이의 손이 살짝 내 손을 당겼다.
"여기 들어갈 수 있어요?"
나는 주변을 살핀 뒤
잠시 문고리를 만져보았다.
자물쇠는 걸려 있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유형이었다.
"조용히 해. 금방 열어줄게."
쇠고리를 천천히 돌리자 낡은 자물쇠는 짧은 숨을 내쉬듯 약하게 > 딸칵 < 하고 열렸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학원 내부에는 불 꺼진 시간들이 눌어붙은 냄새가 깔려 있었다. 칠판에는 [5월 모의고사 D-12]라는 글씨가 누군가 지우다 만 채 남아 있었다.
아이의 작은 등 뒤로
그 문구가 오래 남겨진 희미한 희망처럼 서 있었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살폈다.
바람, 먼지, 끊어진 현수막,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거리.
잠시나마 안전하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아이 옆에 앉자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그거.. 어떤 어른들이었을까요?"
나는 숨을 멈추었다.
아이의 말은
'문 뒤의 그것'에 대한 공포이자,
아이가 그동안 겪어온 어른들에 대한 기억이 어두운 그림자처럼 섞인 말이었다.
아이는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말했다.
"예전에도요.. 사람들이.. 저를 데리고 있다가..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고.. 문을 잠그고 갔어요.."
나는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이의 떨림은
문 뒤의 존재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이의 과거에서 계속 이어지는 죽음과 버림,
그 모든 잔여물이 지금의 공포와 뒤섞여 있었다.
"사람들은 때로는 말이야. 너무 무서우면.. 가끔 안 해야 되는 일을 해버리기도 한단다."
그 말은 변명도, 설명도 아니었다.
"저는 그러기 싫어요."
아이의 말은 너무 작아서
무너지기 직전의 속삭임 같았다.
나는 그 말에 조금 멍해졌다.
아주 오래전,
나도 그런 말을 누군가에게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말이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만 빼고.
"너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아이는 살며시 내 쪽으로 기대 왔다.
머리가 내 옆구리에 닿았다.
그 무게는 가벼웠지만
그 가벼움이 내 몸 전체를 뒤흔들었다.
바로 그때.
멀리서 아주 희미한
> 쿵 < 소리가 들렸다.
도시의 뼈대를 타고
우리에게 닿는 소리.
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아저씨.. 또 와요!"
나는 아이를 더 끌어안았다.
이 도시는
문틈 뒤의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틈 앞에서 사라져 간 사람들,
그리고 문틈을 열어젖히려는 어떤 것들이
동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둘 모두에게서
도망쳐야 했다.
[5장]
학원에 들어온 지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숨을 고르며 칠판 아래에서 웅크렸다. 먼지 냄새와 오래된 책 냄새가 아이의 머리칼에 들러붙어 있었다.
잠깐은 안전할 거라 생각했지만,
도시는 늘 그렇듯 우리 생각보다 먼저 낡고, 먼저 반응했다.
아래층 어딘가에서 > 쿵 < 묵직한 충돌음이 울렸다.
아이는 벌떡 고개를 들었다.
"또 와요!"
나는 대답 대신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손끝이 닿기도 전에,
복도 끝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이자, 낯익은 욕설과 짧은 숨, 그리고 두세 명 정도 되는 사람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그들은 교실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낯선 얼굴, 더 낯선 기색.
굶주림과 불신이 오래 묻어 있는 눈빛이었다.
그중 한 남자가 말했다.
"아으 깜짝이야.. 저기.. 당신들도 들었죠? 아래층에 뭐가 올라오고 있어요."
아이의 어깨가 움찔했다.
나는 침착하게 물었다.
"어디로 빠져나갈 생각이죠?"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낮게 말했다.
"뒷문. 근데"
그의 시선이 아이에게 꽂혔다.
마치 이 상황이 익숙한 사람처럼.
"놈들을 끌어내려면 미끼가 필요해요."
교실 전체의 공기가 순간 식어버렸다.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계속 말했다.
"문만 살짝 열면 돼요. 애 하나면 냄새가 금방 퍼져요. 그러면 놈들이 저쪽으로 몰릴 동안 우린 반대편 계단으로 빠질 수 있고.."
말을 흐린 채,
손가락으로 허공에 무언가 계산하는 동작까지 했다.
"애 하나로 넷이 사는 거면.. 이 정도면 남는 장사 아니에요?"
아이는 천천히 내 옆으로 몸을 숨겼다.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그 한 문장이,
아주 오래된 기억을 찌르는 바늘처럼 꽂혔다.
나는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남은 오래된 흉터.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동안
내 표정이 잠깐,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이 되었을 것이다.
남자는 아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잠깐이면 돼요. 애는 금방.."
그가 손을 뻗는 순간,
나는 그대로 그의 팔목을 붙잡아 벽 쪽으로 밀쳤다.
> 쿵! <
벽이 울렸다.
그는 비명을 지르려다가,
아래층에서 또 한 번 울려 퍼진
> 와장창! <
하는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괴물이 문을 부수는 소리였다.
철과 나무가 찢기는 둔탁한 비명.
나는 칼을 뽑진 않았지만,
그의 목덜미 가까이에 손을 두고 낮게 말했다.
".. 다시 애 쪽으로 손 대면, 당신이 먼저 내려가게 될 거요."
그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순간,
아래층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찢어졌다.
> 으아아악!! 엙- <
또 어딘가에서 생존자 중 한 명이 계단에서 넘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그림자 뒤로,
기괴한 움직임의 실루엣이 느리면서도 확실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한 번 냄새를 맡은 것들은
쉽게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저 썩은 먼지 냄새는
어느 골목이든 끝내 따라붙었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고 말했다.
"도망가자."
뒷문으로 달려 나가는 동안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소리들은
모두 짧고 잔혹한 결말처럼 들렸다.
> 쿵 <
> 끌 <
> 덜걱 <
> 탁 <
찢어지는 무언가
뒤돌아보지 않았다.
누군가는 숫자에서 지워졌겠지만,
나는 아이의 숫자를 유지해야만 했다.
우리는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도시는 이미 해가 져가는 빛으로 어두워져 있었다.
아이는 숨을 헐떡이며 내 옆에서 뛰었다.
그러다 잠시 멈춰 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때문에.. 저 아저씨, 아줌마들.. 그렇게 된 거예요..?”
나는 그 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
아주 오래 묵혀둔 말 하나가 먼저 새어 나왔다.
"미안하다."
아이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는 아이의 손을 다시 잡았다.
한 번 잃어버린 냄새는 오래 남는다.
도시도, 사람도, 죄도,
그리고 거래의 흔적도.
그러나 아직,
우리는 걸어야 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누군가를 남겨두고 돌아서는 그 오래된 죄를
다시 꺼내지 않기로 했다.
[6장]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망쳤다는 사실만이 우리 몸에 남아 있었고, 숨을 고르는 동안에도 발끝은 아직 도망칠 자세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낡은 고가도로 위의 전망대처럼 튀어나온 공간에 다다른 건 거의 우연에 가까웠다.
벽은 갈라져 있었고 난간엔 잔뜩 녹이 슬어 있었지만, 이곳만큼은 소리가 닿지 않는 것처럼 고요했다.
아이는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작은 어깨가 들썩였다.
나는 멀찍이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붉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기묘한 저녁.
하루가 무너지는 빛이 도시 전체를 어딘가 낯선 색으로 물들였다.
멀리 선 아직도 > 쿵 < 소리가 울렸다.
철이 끌리는 소리,
무너지는 소리,
그리고 사람의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울림.
아이는 그 소리에 몸을 한 번 더 움츠렸다.
나는 조용히 아이 옆에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저씨.. 왜 저를.. 데리고 가요? 아까 그 사람들은 저 버리려고 했는데.."
그 말은 울음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꼭 확인해야 하는 질문처럼 들렸다.
나는 대답을 회피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켰다.
"있잖아 아가야~ 예전에 아저씨도 누군가를 지키려고 했던 적이 있었어."
아이의 눈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음.. 정확히는.. 지켜야 했던 사람이었지."
바람이 난간을 긁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날, 딱 오늘처럼..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도 모른 채.. 그 친구를 잃고 말았단다."
나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말로 꺼내는 순간,
과거가 현실처럼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버린 게 아닌데, 버렸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날이 있다.'
말로는 내뱉지 못했지만, 속으로는 내레이션처럼 흘렀다.
아이는 조용히 손끝을 모았다.
작은 손이 떨렸다.
나는 그 떨림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군가를 또 그렇게 남기는 쪽이 아니라, 우리 꼬마 아가씨는, 너만큼은 꼭 지켜주고 싶어."
아이의 눈이 흔들렸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도시는 흐릿해졌고,
빛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은 색으로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그제야 아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럼 저도.. 약속할래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떤 약속?"
아이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저.. 아저씨 안 버릴게요. 저도.. 아저씨 편.. 들래요."
그 말은 작고 불완전했지만,
이 폐허에서 누군가가 건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형태의 신뢰였다.
나는 아이의 손등을 가만히 감싸 주었다.
"그래. 고맙다."
바람이 세게 부딪쳤다.
멀리 선 여전히 > 쿵 < 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뛰지 않았다.
잠깐은,
정말 잠깐은 이곳에 머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늘이 완전히 어둠으로 넘어가기 직전,
도시 위로 희한한 밝음의 잔해가 떠 있었다.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는 흐릿한 빛.
마치 이 세상이 무너져도,
버려진 날의 밝음만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듯.
그리고 나는 아주 조용히 생각했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가는 선택이, 내가 이미 잃어버린 어떤 날을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도시는 어둡고,
우리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
그러나 그 어둠 위에도
조금의 밝음이 남아 있었다.
그건 아마,
[7장]
밤은 완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해가 졌다는 감각은 이미 오래전에 희미해졌고,
도시는 그저 하나의 커다란 짐승처럼 그 안에서 웅크린 우리를 가만히, 숨죽여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멀리서 또 한 번,
> 쿵 <
지하에서 솟구치는 듯한 소음이 울렸다.
아이는 놀라 내 팔을 쥐었지만
금세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하루 만에,
이 아이는 너무 많은 것을 스스로 배워버렸다.
나는 잠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작은 체온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아저씨."
아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어디로 가요?"
나는 대답을 하려다 말고 도시 아래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몇 군데는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연기 기둥, 울린 유리창 파편,
불 꺼진 건물 틈에서 새어 나오는 누군가의 비명인지,
바람인지 모를 소리.
이 도시는 끝나가고 있었다.
부정하려 해도,
이제는 형태조차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아이는 살아 있어야 했다.
오늘의 도망이 내가 또 다른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듯이.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래쪽 말고.. 북쪽으로 가볼까?"
"왜요?"
"높은 산이 있어. 기억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숨으려 했던 곳이 있단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아이가 조용히 말했다.
"아저씨."
"응?"
"그 약속. 아저씨가 저보고 의심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나는 놀라서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바람에 찢긴 셔츠 소매를 두 손으로 모으며 말했다.
"저도.. 아저씨가 언제까지 저를 지켜줄 수 있는지 그거 고민하지 않을래요."
"그냥.. 오늘은요. 같이 있는 게 좋아요."
나는 말없이 아이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도시는 어둠으로 가라앉아 있었지만,
아이는 온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온기는
얼마나 무너진 세계에서도
쉽게 꺼지지 않는 종류의 불빛이었다.
우리는 고가도로 끝을 지나
어둠이 한 겹 더 깊어지는 길로 발을 들였다.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은 차갑기만 했지만
그 속에서 아이의 손은
따뜻했다.
도시는 뒤에서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고,
우리는 그 무너짐을 등진 채 걸어갔다.
밤인지 낮인지 구분도 어려운 흐릿한 하늘 위로
아직 사라지지 않은 밝음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마치 이 세계가 끝나가도,
버려진 날의 밝음만큼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으려는 듯이.
나는 아주 조용히 속으로 말했다.
사라지지 않는 죄 위에서도,
누군가는 계속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오늘은 우리가 되기를 바랐다.
세상이 무너질 때 처음 사라지는 것은 건물이 아니다.
서로를 믿는 능력이다.
그리고
세상이 무너진 뒤에도
가장 늦게 사라지는 것은
이상하게도, 서로를 향한 작은 바람이다.
인간은,
끝내 이해받고 싶어 하고,
이해하고 싶어 하며,
누군가를 버리지 않은 날을 오래 기억한다.
문틈 뒤의 괴물과
문틈 앞의 인간 사이에서 흔들리다가도,
우리는 결국 누군가의 손을 잡아버리는 종이다.
그래서 세상은 수없이 폐허가 되었고,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낡은 길을 다시 걸어 나왔다.
무너진 날의 잔해 위를 건너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늘 같은 방향을 찾는다.
버리지 말아야 할 존재를,
버리지 않은 세계를,
그 바람은 지금도 여전히 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