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에서 출발하는 모든 노선의 버스가 증평우체국 앞 승강장을 거쳐간다.
청주, 진천, 괴산, 청천, 오창, 음성 등 그리고 증평 관내의 작은 마을들...
그러하니 증평우체국 앞 승강장은 증평군에서 제일 많이 붐비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날도 승강장은 버스로 만원(滿員)이어서 괴산 시골버스는 승강장 말석에 버스 뒤꽁무니를 2차선에 걸친 채 꿩처럼 승강장에 머리만 들이박고 앞문을 개방해놓고 있었다.
"이 버스는 진천 안 가요?"
"안 갑니다. 청천 터미널 갑니다."
멀쩡하게 생긴 놈이 앞문에 머리를 디밀고 나에게 물어본다.
"그럼 진천 가는 버스가 몇 시에 와요?"
"모릅니다."
"왜? 진천 가는 버스시간을 몰라요?"
별 미친놈을 다 보네...
'이놈을 잠깐 내려서 한대 쥐어박고 갈까?'
마음속에서 악마가 나에게 속삭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놈이 알아듣도록 나지막한,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로 조용히 얘기했다.
"진천 가는 버스기사에게 물어보세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한 번 더 물어보면, 넌 나한테 죽는다'
질문도, 대답도 부조리 연극을 하듯 했다.
앞에 있던 다른 버스가 출발하면서 승강장 앞자리에 공간이 생겨 버스를 앞으로 이동하였다.
승강장 앞쪽에서 기다리던 승객을 태우려고 버스 앞문을 열었다. 청천 가는 승객들이 버스에 오르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한 사내가 머리를 들이밀고 나에게 질문을 하였다.
" 이 버스 진천 가나요?"
아까 그놈이었다.
질문하던 당사자나 내용은 그대로이고 질문의 형식만 바뀌었다.
부정문에서 긍정문으로...
학창 시절 물리학과에 키가 자그마하고 통통하신 노(老) 교수님이 한 분 계셨다.
서슬 퍼렇던 군부독재 정권 시절 독재타도를 외치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학생들의 주장을 펼치고자 교문을 박차고 나갈 때쯤이면,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아, 교수님이던, 교직원이던 감히 학생들 앞에 나서서 제재를 못 하였다.
그때, 바로 노 교수님이 학생들 앞에 나서서 학우들의 이성을 잃지 않도록 일깨워주시곤 했다.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교수님은 오롯이 제자들의 안위(安危)가 걱정돼서 나오신 거였다.
나는 사실 부친이 공무원이라는 핑계로 적극적으로 학우들과 동참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마음의 빚으로 남아있다.
하루는 강의 시간이 다 되어서 담당교수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뒷문이 열리면서 바로 그 老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에~여기가 응용물리학과인가?"
"아닙니다. 응물과는 옆 강의실입니다!"
잠시 후 앞문이 열리면서 다시 그분이 들어오셨다.
"에~여기가 응용물리학과 아닌가?"
단지 긍정문에서 부정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개중에 키득거리며 웃는 학우들도 있었지만, 교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을 하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 모두 교수님 생각의 깊이를 알기에...
진천 가고자 했던 승객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그놈도 머릿속에 깊은 생각이 있겠지...'
혹시 제가 앞에 말씀드린 발언 때문에 그놈의 후일담이 궁금하신 분들이 있을 것 같아...
액션 영화의 한 장면을 기대하셨다면, 꿈 깨시라!
자칭 지성인인 내가 폭력을 행사할 리가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와일드하고 간 큰 사람이 아니다.
그놈 아무 일 없이 그냥 고이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