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는 내가 유아기 때 돌아가셔서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러나 할머님은 구십이 넘도록 장수하셨고, 두 분은 슬하에 3남 2녀를 두셨다. 나의 부친은 위에서 두 번째 아들로 고모님들은 모두 동생들이었다. 그중 막내 고모는 성격이 활달하시고 밝아서 모든 식구들의 애정을 독차지하셨는데, 특히 둘째 오빠 즉, 나의 부친과의 가족애는 남 달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부친(父親)은 매제(妹弟)를 친동생처럼 각별히 여기셨고 고모부 또한 나의 부친을 친 형님처럼 모셨다고 했다.
그러던 아버지가 내가 대학 2학년이 되던 해에 지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들에게 아버지가 가장 필요하다는 스무 살 나이에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천붕(天崩)을 경험했다. 그런 나에게 작은 고모부는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 메꿔주신 고마운분 이었다.
요즘 말로 수구세력이시면서, 전두환 찬양론자 이시다.
나는 고모부와 대화를 할 때에도 가급적 정치적인 대화를 멀리 하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대화 도중 의견이 대척점(對蹠點)에 이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면 눈치껏 대화의 초점을 비껴 서로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눈치껏 퇴로(退路)를 열어놓고 대화를 계속했다.
젊어서 사업을 하실 때도 관계자에게 뇌물을 주셔야 직성이 풀리셨고, 그래야 인간관계가 원할해진다고 믿는 분이었다. 막내 고모가 암 수술을 하시는 날에는 고모를 살려야 된다는 집념으로 집도의(執刀醫 ; operating surgeon)의 수술복에 현금을 찔러 넣어주셨던 분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고모부를 존경했고 또 좋아했다. 작은 고모부도 처조카인 나를 각별히 이뻐해 주셨다. 대학 등록금 등의 금전적 도움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의 정신적 지주 역할도 해주신분 이었다.
그 고모부가 일 주일전 돌아가셨다.
나는 장례식장 주변을 삼일 내내 맴돌며, 장례식장 빈소 구석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장성한 아들이 셋이나 있는 장례식장에 환갑에 가까운 처조카가 유난을 떤다는 소리를 들을까 두려워,
마음놓고 슬퍼하지도 못했다.
고인은 화장장에서 화장을 했다.
유족들은 고인이 화장장 화로에 들어가는 장면을 반투명한 가림막 너머로 지켜보았다.
"완전 소각 까지는 한 시간 삼십 분정도 소요되오니 유족분들께서는 식사를 하고 오십시오!"
장례지도사가 정중하고도 건조한 목소리로 나즈막이 말하였다.
우리는 화장장 이층에 있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나는 새벽부터 부산을 떤 연유(緣由)로 허기져 있던 배를 부여잡고, 고인을 화장장 화로에 밀어 넣었듯이...
갈비탕을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삶이란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