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현생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이다.
그 뜻은 라틴어로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또한, 호모 사피엔스보다 앞서서 지구 상에 살아왔던 동일한 사람 속(屬 ;Homo genus)인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neanderthalensis)가 있었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 상에 등장한 순간 멸종했다. 최근 고고학자들의 발견에 의하면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와는 동시대에 같이 생존했었다고 알려졌다. 그리고 네안데르탈인은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건을 계기로 멸종하게 되었고, 지금은 지구 상의 유일한 호모 종인 호모 사피엔스만이 지구별에 살아남아 찬란한 문명을 이루며 살고 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에는 현생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갖고 있는 사악한 잔인성과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어떤 부정의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만났을 때 역사상 최초의 인종 청소(人種淸掃)가 일어났을 것으로 추측했다.
이 가설은 '총, 균, 쇠'의 저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도 궤를 같이 한다.
진화에 관한 책들을 읽다 보면, 인간의 잔인성에 대하여 기술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잔인성으로 부각되지만 큰 테두리로 보면, 인간도 지구 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의 하나로 한 종(種)의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다른 종과 구분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사악한 잔인성'이란 단어를 부여해 매도당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자나 호랑이가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것을 잔인하다고 말하지 않듯이, 인간도 생명을 유지하고 인류라는 종(種)을 후대에도 종속시키기 위하기 위하여 타종(他種)들과 경쟁하면서 진화해 왔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나, 보스니아 내전의 인종 청소 등 외국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승만의 4.3 제주 양민학살과 전두환의 광주시민에 대한 살육행위 등 인간의 잔인한 행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행되어왔다. 물론, 이런 행위들을 추호도 비호해줄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도 호모 사피엔스의 '잔인성'에서만 기인한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이 사건들은 모두 인간이기를 포기한 일부 짐승 같은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니, 개개인의 인성을 무시하고 포괄적으로 '호모 사피엔스의 잔인성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라고 표현할 사항은 아닌 것으로 사료된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더 큰 용량의 뇌와 튼튼한 골격을 지녔던 것으로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여 증명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소한 체구와 덜 똑똑한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지배하는 최후의 인간이 되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항상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었다.
그 대답은 네덜란드의 사상가 뤼트허르 브레흐만(Rutger C. Bregman)의 저서 휴먼카인드(Humankind)에서 '인간의 친절하고 선한 본성으로 인해 생겨난, 네안데르탈인보다 우월한 사회성에서 찾을 수가 있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은 외부적인 요인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네안데르탈인이 지니고 있는 내부적인 성향이라고 항변한다.
네안데르탈인은 사냥에 특화된 튼튼한 몸과, 명석한 두뇌 등, 자신보다 능력이 부족한 구성원들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것보다, 독립적 생활이 생존에 유리하도록 진화되어, 사실상 사회성이 결여된 종족이었을 확률이 많다.
외부적인 요인, 즉 빙하기 등의 환경의 변화가 도래하였을 때, 혹은 몸이 부상을 당하여 사냥을 못 하여 죽을 처지에 놓여 있을 때, 도움을 받지 못하여 쓸쓸한 죽음을 맞이 하였을 것이다. 이런 현상이 점진적인 개체의 감소로 이어져 멸종되었다는 설이다.
거기에 반해 호모 싸피엔스는 신체적, 정신적 열세를 만회하고, 생존을 위한 서로 돕는 사회성이 네안데르탈인보다 비교 우위에 있다고 한다. 그 사회성이 호모 싸피엔스가 최종적으로 지구 상의 지배자로 생존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라고 보고 있다.
모든 사회는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강자와 약자는 절대 기준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강자와 약자가 공존하는 절대적 조건은 강자가 약자를 거두는 일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강자와 약자의 입장이 뒤바뀌기도 하고, 강자가 사건, 사고를 만나서 육체적 손실을 입어 약자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특히, 전자는 어린아이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고, 성인이 나이가 들어 노약자가 되는 일일 것이다. 어린 자식을 돌보던 부모는 나이가 들어 성장한 자식에게 보살핌을 받는 경우가 그에 해당된다. 내가 약자를 돕는 것은 나에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에 대한 보험을 드는 것이다.
나는 시골 버스 안 승객들에게서 약자를 돕는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들을 본다.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노인은 지팡이를 든 노인을 돌보며, 지팡이를 든 노인은 유모차를 닮은 보행기를 사용하는 노인을, 허리가 구부러진 노인은 꼿꼿한 노인이...
본인보다 약자라고 여겨지는 상대방을 돕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서로 돕는 것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조직원들의 서로서로 돕는 행위는 지구 상에서 살아남은 인류의 종(種)으로 당연한 행위인지도 모른다.
"약자를 도우라!"는 대명제는 신이 인간의 옆에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생존의 문제로 있어 왔다.
당연한, 또 당연히 해야 할 행위임에도 안 하는, 아니 못하는 인간들이 있다. 우리가 약자를 돌보고 선한 사회를 유지하는 것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나, 사후에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의 후손들을 이 땅에 살아남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최선책이다.
그것이 "슬기로운 사람"의 이름에 걸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