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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에 대하여

by 한지원

괴산 터미널에서 이다.

"기사양반 나 화장실 좀 다녀와도 돼유?"

"그렇게 하세요!"

"여기 짐 놔두고 가요?"

"네! 그렇게 하세요."


버스는 출발할 시간이 다 되었는데...

화장실 가셨던 할매는 언제 오실 줄 모르고...

시골 버스기사는 비단구두 사 가지고 온다던, 서울 간 오빠를 기다리는 누이동생처럼 애타는 가슴을 졸이면서 할매를 기다렸다.

출발시간을 몇 분 훌쩍 넘겨, 만족한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바로 그 할매가 버스에 승차했다.

룸미러로 보이는 버스 안의 수십 개의 눈동자는 불쌍한 시골 버스기사를 비웃는 듯이 보이고...

아인슈타인은 그놈의 상대성이론을 생각해 내서 나로 하여금 시간이 느리게 가는 걸 체험시키는지 모를 일이다.

"어르신 왜 이리 늦으셨어요?"

"응! 간 김에 카드 돈 좀 채우느라구..."

버스에 짐도 올려놓았겠다, 기사에게 허락도 받았겠다, 당신 볼 일 다 보고 오시더라도 버스가 출발 못 하리란 걸 간파하신 할매는 당신의 업무를 모두 해결 후 버스로 복귀하신 것이다.

' 왜? 가락국수이라도 한 그릇 하고 오시지...'

비꼬는 소리가 입속에 맴돌았지만 차마 입 바깥으로는 내놓지 못하였다.

한 번을 그렇게 당한 시골버스기사는 곰쓸개 대신 멸치 똥을 씹어 먹으며 다시는 이런 우(愚)를 범하지 않으리라 다짐 또 다짐했었다.

이런 일을 당한 지 벌써 삼 년이 다 되어간다.

이제는 나도 얼굴이 승객들에게 알려질 만큼 알려져서 승객들이 술수를 쓰지 않지만, 아쉽게도 치매가 있는 노인분들이 지금도 화장실 간다고 기사에게 물어보시는 경우가 있다.

"가시는 건 자유롭게 하시구요, 버스는 출발시간 되면 갈 겁니다. 아 참! 짐은 들고 가세요!"

좀 야박하지만, 버스 출발시각 때문에 가슴 졸이던 상황을 원천 봉쇄하는 발언을 한다.


아침 첫차로 청천을 갔다가, 노선을 되짚어 괴산으로 돌아오는데, 산골 마을에서 건고추 자루를 둘러맨 젊은 친구가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에 승차하기 편하라고 뒷문을 열어주니, 얼씨구나 하고 올라타는 게 표정으로 읽힌다.

버스 안에는 커다란 건고추 두 자루와 젊은 친구, 그리고 버스기사 이렇게 있었다.

"기사님! 이 차가 8시 10분에 다시 청천으로 돌아가는 차 맞죠?"

"네!"

"동부 방앗간에 고춧가루 내러 가는데 이 차를 다시 타게 해 주실 수 없을까요?"

"8시 10분까지 터미널로 오세요!"

"혹시 1~2분 늦으면..."

'아니, 이게 무슨 헛소리래!'

동부 방앗간을 가는지, 차부 방앗간을 가는지 내가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질문의 요지는 '내가 혹시 늦으면, 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조그마한 친절을 베푼 것이 젊은 친구에게는 버스기사가 만만해 보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보세요! 버스를 타고 못 타고는 아저씨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도대체 버스기사에게 무슨 답을 듣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어쨌거나 정각 8시 10분에 버스는 출발하니 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잔뜩 볼멘소리로 젊은 놈에게 쏘아붙였다.

예전의 분노가 뇌 속에 각인(刻印, imprinting)되어 있었던지라 한 마디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 연세 팔십 먹은 노인네나 하는 말씀을 어떻게 젊은 양반이 합니까? 당연히 버스는 시간표로 움직이지, 개인의 사적인 스케줄에 맞추는 버스 봤어요! 젊은 양반이 경우가 없으시네! "

더 심한 말을 할 수도 있었으나, 자칭 지성인이라 자부(自負)하는 내가, 체면이 깎이는 것 같아 그 선에서 자제하기로 했다.


요즘 괴산 어디를 둘러봐도 울긋불긋 단풍이 보기 좋다. 작년 같이 선명한 맛은 없지만, 가을이 깊어가며 조금씩 조화를 이루어 그냥 봐줄만하다.

봄에 피는 꽃들과 가을 단풍의 화려한 색채는 겉보기에 서로 어우러져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꽃은 새 생명을 잉태하여 자손을 퍼뜨리기 위한 창조의 몸짓이나, 단풍은 스러져가는 생명이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가을이 깊어감에 녹색의 나뭇잎이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어가듯, 나이가 먹어감에 세월(歲月)과 세속(世俗)에 울끈불끈 내 마음이 물들어 간다. 녹색으로 푸르름을 자랑하던 여유 있던 마음이, 별로 내세울 것도, 보잘것없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시골 노인들과 얼굴을 붉히는 자잘한 존재가 되어 간다.

조금 더 세월이 깊어지면, 그나마 남아있던 알량한 마음조차도 낙엽처럼 땅에 떨어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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