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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오 Oct 28. 2022

고혈압을 두려워하지 않아 회담을 그르친 루스벨트

    1945년 초, 2차대전 종전을 앞두고,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미국, 영국, 소련의 실무협상팀은 회담에 유리한 장소를 잡기 위해 치밀한 기싸움을 벌였다. 미국과 영국은 몰타, 로마, 예루살렘, 이집트, 그리스를 제안했지만, 협상을 먼저 제안한 소련은 줄곧 자기네 영토를 고집했다. 회담 장소가 협상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걸까? 


    결과는 러시아 스탈린 서기장의 승리. 장소는 흑해 연안 크림반도에 있는 휴양지 얄타로 정해졌다. 스탈린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 처칠 총리의 건강을 배려하는 척 하면서, 로마노프 왕조 대대로 휴양차 찾던 따스한 바닷가를 권했다. 회담장인 리바디아 궁은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가족과 함께 자주 머물렀던 가장 화려한 별장이다. 


    회담 전 날 저녁, 노회한 스탈린은 루즈벨트에게는 50도짜리 최고급 보드카를 권하고, 자신은 몰래 맹물로 희석한 보드카를 마시면서 12번이나 건배를 제의했다. 다음 날 아침, 처칠이 오기 전에 불쑥 찾아온 스탈린은 4살 어린 루즈벨트의 ‘약한 음주’를 나무라며 협상에서 계속 빈틈을 노렸다. 결국 회담은 스탈린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동유럽과 한반도에서 소련의 발언권이 강해졌다.


    당시 60대, 70대의 세 정상은 비슷한 지병을 앓고 있었지만 모두 1급 비밀로 숨기고 있었다. 회담을 준비하면서 개최국인 소련은 식단을 짜면서 다른 정상의 식성과 건강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즐기는 술과 담배의 브랜드를 물어보면서 루즈벨트가 건배를 거절하지 않는 호방한 애주가라는 걸 눈치채고, ‘보드카 작전’을 짰던 것이다. 


    미국 협상팀의 완벽한 패배였다. 가장 먼 8,000km를 날아와야 했던 대통령의 여독(旅毒)과 빠른 ‘공군 1호기’(Airforce One)로 생기는 시차(Jet lag)를 계산하지 못했다. 현장에서 주치의는 호방한 대통령의 건강을 꼼꼼하게 챙기지 않았고, 비서진은 여독과 시차 때문에 졸리는 아침에 숙취로 풀어진 대통령을 말리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 협상팀에 소련 스파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협상팀 최고책임자였던 국무부 차관 앨저 히스다. 그는 대통령이 젊을 때 앓은 소아마비로 거동이 불편하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금주법을 폐지할 만큼 술을 즐기고 고혈압과 심부전과 기관지염을 앓고 있으며 혈관성 치매로 가끔 인지장애를 보인다는 기밀정보까지 흘린 것이다. 


    얄타회담에 참석한 세 정상을 나이로 보면 처칠은 71세, 스탈린은 67세인데, 루즈벨트는 63세로 제일 젊었다. 모두 흡연과 음주가 상당히 심했고, 고혈압, 동맥경화, 심부전, 뇌졸중 같은 비슷한 심혈관 질환을 두루 앓고 있었다. 회담이 끝난 뒤 처칠은 20년, 스탈린은 8년을 더 살아 각각 91세와 75세로 죽었지만, 제일 젊은 루즈벨트는 바로 두 달 뒤 사망했다. 사인은 뇌출혈. 사망 직전에 잰 이완기/수축기 혈압이 무려 190/300 mmHg였다. 


    대공황으로 어수선하던 1933년, 루즈벨트는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가 고른 두려움 목록에는 고혈압이 없었을까? 그의 술버릇과 고혈압 때문에 동유럽과 한반도의 정세가 달라졌다.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는 그저 얻는 게 아니라 쟁취해야 한다’고도 했다. 건강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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