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걷기
‘이름 없는 들꽃도 너와 나의 재산이다’
해파랑길 6코스 어딘가 소나무에 걸려 있던 이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꽃을 꺾거나 훼손하지 말자는 취지의 표어일 것이다. 트레킹을 하면서 나무 이름, 꽃 이름을 알아가는 과정은 트레킹의 즐거움 중 하나다. 이번 세 번째 해파랑길 트레킹은 혼자였다. 첫 번째는 사랑하는 막내딸과, 두 번째는 친구들과 함께했었다. 이번에는 울주군 청량읍에 있는 구 덕하역에서 걷기 시작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울산역에 도착한 뒤, 급행버스를 1시간 남짓 타고 도착하니 오전 10시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출발했으니, 이 먼 곳까지 단 5시간 만에 도착한 셈이다. 지난 시절을 돌아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여정이다.
이 날은 대통령 사전투표일이어서, 먼저 의무를 다하자는 마음으로 청량읍사무소에 들러 신성한 한 표를 행사했다. 지나가는 분에게 덕하역의 위치를 물었더니,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시민들이 참 친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작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42일간 다녀왔다. 그때 산티아고순례길 주변 사람들의 친절함에 깊이 감동했다. 물건을 사거나 음식점에 들를 때에도 실망한 적이 없었다. 한 번은 손주를 데리고 가던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었는데, 손짓으로 설명하시다가 우리가 잘 못 알아듣는다고 느끼셨는지 직접 그 장소까지 데려다주셨던 기억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에 못지않게 참 친절하다.
이번 여행의 시작점인 구 덕하역은 폐역이다. 폐역을 도서관이나 역사박물관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놓은 곳이 많기에 호기심에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정이 있겠지만 이곳은 기대와는 달랐다. 문을 밀어보니 “삐” 하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에 놀라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한 걸음 한 걸음 발길을 옮기면서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노란 큰금계국 군락이 보이기 시작했고, 낮달맞이꽃, 브라질국화, 감자꽃도 눈에 들어왔다. 들길을 조금 걷다가 푸르름이 더해지는 산길이 시작된다. 울산 남구라는 표지석이 보였다. 얼마 전 울산으로 전출 온 후배와 다녀간 지역이다.
태화강 주변이다. 태화강은 서울의 한강을 닮았다. 울산을 가로지르며 형성된 강으로, 어느 곳을 가나 이 강과 마주친다. 태화강 주변의 산을 오르내리며 10km 넘게 솔향기를 맡으며 걸었다. 그러다 저수지를 활용한 호수공원을 만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눈에 띄었다. 호수 안에 떠 있는 나뭇가지 위에 햇볕을 쬐고 있는 자라도 보였다. 10리 대나무 숲도, 한적한 바닷가 마을을, 그리고 가끔은 화려한 도시를 만나기도 한다. 걷는 시간이 즐거운 것은, 눈에 들어오는 하나하나가 새롭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시골 출신이고 도시에서 40여년 이상을 산 나에게는 모든 것이 익숙했던 풍경들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보이지 않던 자연의 아름다움이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들꽃 한 송이, 들풀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된다. 사람의 행동도 다시 보게 되고, 걷다 보면 모르는 사람에게도 인사를 건넨다.
울산에서 경주로 넘어가는 바닷가에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캠핑을 즐기는 사람, 낚시하는 사람, 주말을 이용해 가족과 함께 바다를 보러 온 사람들까지 다양한 모습이 보인다. 고기를 굽기도 하고, 햇볕 아래 벗은 몸을 드러 내고 책을 읽는 이도 있다. 이번 여행을 하며 캠핑카의 다양함을 새삼 느꼈다. 대형버스, 고급 차량, 밴형, 트럭 기반 캠핑카까지 정말 가지각색이다.
걷던 중 마을버스 크기의 차량 한 대에 “길 떠나자! 더 늦기 전에”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차량 옆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가 고기를 굽고 계셨다. 궁금해서 “이 차량이 캠핑카인가요. 안을 좀 볼 수 있을까요?”라고 여쭈었더니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차량 안에는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주가 있었다. 내부에는 일반 버스처럼 의자가 놓여 있었고, 차량 뒤쪽에는 잠자리를 마련해두었다. 구경을 마치고 나와 감사 인사를 드리자 아주머니는 “아들과 가끔 이렇게 좋은 곳이 있으면 와요”라며 웃으셨다. 그 말씀 속에서 진한 행복이 느껴졌다.
마을버스를 개조해 세계 여행을 한 ‘마을버스로 세계여행’이라는 책의 저자 임택 작가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감동이 다시 떠올랐다. ‘여유가 있어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떠나니까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이 문장을 어디선가 본 적 있다. 정말 공감된다. 특히 나처럼 걷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와닿는다. 느리게 걸으면 보이는 것들이 많다. 자동차나 자전거 여행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 말이다. 1박 2일 혼자 여행은 해봤지만, 3박 4일 일정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밥을 혼자 먹고 숙소에서 혼자 자는 일, 쉬운 듯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술을 마셔보기도 했다. 숙박비가 아깝다는 생각에 3만 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잘 수 있다는 말만 믿고 들어갔지만, 밤새 추위에 떨어야 했다. 그때 옆에 있던 24시 무인 커피숍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게 추위를 녹이며 바라본 바다, 그곳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처음 본 것처럼 아름답다는 것도 알았다. 아직 보고 싶은 것들이 많아 나는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