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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도 Jul 31. 2023

모자이크 환상

여섯 번째 환상  산티아고 · 언어의 바다(2)

Poetic Novel & Story Poem

(시 소설 소설시)

모자이크 환상


시와 소설의 경계를 해체하는 순수문학 판타지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문(詩文) 속에 펼쳐지는 경이로운 환상의 세계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새로운 장르가 열린다     


여섯 번째 환상 

산티아고 · 언어의 바다(2)     



 



#1. 노인의 바다(계속)






이제 해는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노인은 배 바닥에 꿇어앉아 물속에 드리워진 낚싯줄 미끼가 똑바로 드리워져 있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햇빛은 맑은 물속 깊숙이 투사되고, 그 빛에 속살이 드러난 바닷속 풍경은 오묘하고 신비로웠다. 플랑크톤의 빨간 부유생물이 봄날 꽃가루처럼 물결에 흩날리고, 해저 바위틈에서 자라난 해초 군락이 빠른 조류에 춤추듯 하늘거렸다. 그 해초 사이를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유영하고 있었다. 


― 저 물속의 플랑크톤이나 크고 작은 물고기들도 모두 어머니 바다의 품속에서 자라는 형제들이지. 어머니 바다가 없다면 저것들도 존재할 수 없고, 어부도 존재할 수 없어. 그래서 어부는 항상 어머니 바다에 감사해야 해. 그래, 이곳은 물살이 빠르고 먹잇감이 풍부해 물고기들이 많이 모여들 것 같군. 여기서 운이 좋으면 큰 놈 하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그때 낚싯줄에 매달린 초록색 막대기가 물속으로 쑥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 녀석들이 이제야 미끼 냄새를 맡았나 보군. 그래, 어서 오나라. 얘들아. 


노인이 반갑게 인사하고 낚싯줄을 잡아채어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낚싯줄 끝에는 두 뼘 남짓한 제법 큰 다랑어 한 마리가 매달려 팔딱이고 있었다. 


― 어머니 바다가 너는 아직 어리다고 하는구나. 그래, 너는 좀 더 자라야 해. 


노인이 다랑어의 주둥이에 꿰인 바늘을 조심스럽게 빼내고 다시 바다로 돌려보냈다. 너도 아직 어려, 너는 어머니 바다가 허락을 않는구나, 이런! 너는 배 속에 알을 가득 배고 있구나, 너는 덩치는 꽤 크지만 아직 어린 새끼 돌고래일 뿐이지. 두세 시간이 흐르는 동안 꽤 많은 물고기가 노인의 낚싯줄에 연달아 걸렸지만, 노인은 그때마다 혼잣말 핑계를 대면서 한 마리도 잡지 않고 다시 바다로 돌려보냈다. 내가 보기에는 어른 팔뚝보다 더 커서 다 자란 성어처럼 보이는데도 노인에게는 어린 새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런 노인을 보면서 나는 문득 생각이 들었다. 노인은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어머니 바다가 잡아도 좋다고 허락한 고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스페인말로 액운의 최악의 상황을 의미하는 <살라오(Salao)> 신세를 스스로 감수하면서도 오로지 어머니 바다가 허락한 고기만을 잡아야 한다는 자신이 정한 원칙, 고기를 잡아 하루하루 연명해야 하는 어부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신만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주름살에 덮인 노인의 깊고 푸른 눈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운 자각과 노인에 대한 경외심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동안에 북쪽 하늘에서 피어난 회색구름이 점점 중앙으로 몰려와 짙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우중충한 구름에 빛이 차단되어 검푸르게 보이는 바다수면에 이따금씩 빗방울도 툭툭 떨어졌다. 그때 낚싯줄에 매달린 초록색 막대기가 휘익,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고 바닥에 꽈리를 틀어 개어 놓은 예비사리 낚싯줄도 빠르게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물속으로 풀려나간 낚싯줄이 잠시 느슨해지자 이번에는 노인이 낚싯줄을 잡아채고 끌어당기며 말했다. 


― 그래 반갑다. 고기야. 바로 널 기다리고 있었단다. 


노인은 대어를 직감한 것 같았다. 낚싯줄은 이내 노인의 팔뚝에 불끈 솟아난 굵은 힘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때 물속 고기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빠르게 나아가고, 노인은 고기가 끄는 힘을 최대한 버티다가 팽팽해진 낚싯줄을 약간 풀어주며 다시 말했다. 


― 그래, 나는 이제 준비가 되었어. 너도 인사를 하는구나. 방금 손맛으로 보아 너는 지난번 그놈과 같은 청새치가 분명하구나. 


말을 하는 동안에 줄이 조금 더 느슨해지자 노인은 상체를 뒤로 젖히며 다시 줄을 힘껏 끌어당기고, 줄은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그러나 노인이 지난번 대어를 잡을 때처럼 물속 고기가 배를 끌고 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끌어당기는 노인의 힘에 고기가 쉽게 끌려오지도 않았다. 줄이 너무 팽팽해져 자칫 끊어질 듯하면 잠시 줄을 풀어 느슨하게 했다가 다시 끌어당기는 노인과 물속 고기와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 고기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어느 방법으로든 다른 것들을 죽이고 있지고기가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나는 어부가 되기 위해 태어났어.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은 고기와 어부의 운명이야. 그러니 서로 미워하지는 말자꾸나. 


그때 하늘의 짙은 구름이 검은 장막처럼 바다를 덮어씌우고 우두둑,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배도 가랑잎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인은 개의치 않고 고기가 끄는 힘에 최대한 버틸 수 있도록 낚싯줄을 어깨에 걸고 앉아 등 뒤로 돌린 왼손과 앞으로 내민 오른손으로 줄을 꽉 움켜쥐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노인은 고기가 힘이 빠지는 순간을 포착하여 조금씩 줄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구름 장막에 가려 어두워진 바다에 파도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비도 한층 더 세차게 내렸다. 노인과 고기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거의 한 시간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그사이 반복되는 낚싯줄의 접촉에 쓸린 노인의 오른손바닥 상처딱지가 벗겨져 피가 흘렀다. 그러나 그때까지 고기는 한 번도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시 한 시간은 더 흐른 것 같았다. 이제 노인의 오른쪽 어깨도 낚싯줄에 쓸려 셔츠가 피에 젖어있고, 왼손바닥도 곧 터질 것처럼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다행히 비와 바람은 수그러지고, 다시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사이 멀리 서쪽 해안 산마루 하늘에는 어느새 옅은 노을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 고기야. 너는 벌써 삼십 길 이상이나 끌려왔어. 처음 드리운 낚싯줄에 예비 사리 길이를 더 하면 너는 지금 오십 길 정도 떨어진 물속에 있겠지. 네 모습을 빨리 보고 싶구나. 


비에 젖고 헝클어진 머리에다 피곤이 역력한 표정에 가끔 잔기침까지 쿨럭쿨럭, 하고 있었지만, 노인의 목소리에는 아직 생기가 넘쳤다. 


― 고기야. 나는 지금 지쳐가고 있어. 그렇지만 인간은 패배하려고 태어나지는 않았지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할 수는 없어


노인이 다시 팔뚝에 불끈 힘을 주어 낚싯줄을 끌어당기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한동안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노인은 이제 고기와 대화를 나누듯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 그래, 고기야. 너도 패배하고 싶지는 않겠지. 사실 방금 내가 한 말은 젊은이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지. 나도 한창 젊었을 때는 패배할 수 없다는 이 말을 굳은 신념으로 삼고 살았지. 심지어 얼마 전 그 굉장한 녀석과 싸울 때도 이 말을 했었지. 그러나 고기야. 인간은 말이야. 


그때 고기가 왼쪽으로 급하게 방향을 틀면서 빠르게 줄을 끌고 나갔다. 노인과 고기의 한 치 양보 없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다시 시작되고, 줄이 약간 느슨해지자 노인은 크게 숨을 몰아쉬고 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 고기야. 인간은 결코 패배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야. 오히려 인간은 실패를 통해서 더 많이 배우고, 패배를 통해서 진정한 겸손의 의미를 알게 되지. 인간정신을 보다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야. 그러니까 고기야. 최선을 다했다면 실패와 패배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야. 비난받을 일도 아니고 굴복을 의미하는 것은 더욱 아니야. 그러니 우리도 최선을 다하자. 자, 이제 너와 나의 거리는 삼십 길 정도, 곧 네 모습이 보이겠구나.     




다시 한 시간쯤이 더 흐른 것 같았다. 그러나 고기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제 비는 완전히 그치고 서쪽 산마루 하늘에서 번진 노을이 바다수면을 점점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낚싯줄을 통해 통화를 하는 것처럼 노인과 물속 고기의 대화도 계속되고 있었다. 


― 고기야. 우리가 살아가면서 저지르는 제일 어리석은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희망을 버리는 일이야. 희망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죄악이야. 모든 생명체는 마지막 한 호흡을 마치고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는 희망이 있어. 심지어 죽은 후에도 새롭게 평가받아 되살아 날 수 있는 희망도 있지. 


그때 고기가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힘차게 줄을 끌고 나가고, 노인은 힘에 부친 듯 어깨로 지탱하고 있던 줄을 풀어주면서 숨찬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런데 고기야. 희망을 버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있어. 그것은 실패할까 겁이 나 시도해 보지도 않는 일이고, 패배할까 두려워 미리 포기해 버리는 거야. 이것이야말로 희망뿐만 아니라 미래의 행운까지 제 발로 걷어차 버리는 가장 어리석은 일이지. 이것은 자신을 스스로 파괴해 버리는 더 큰 죄악이야. 


잠시 후 줄이 다시 느슨해지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노인은 숨을 크게 몰아쉬고 줄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어두운 물속에서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검은 형체가 보였다. 


― 그래, 고기야. 드디어 네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노인은 자못 기대와 흥분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때였다. 검붉은 수면 아래에서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커다란 물체 하나가 공중으로 힘차게 솟구쳐 올랐다. 일견해도 노인의 몸보다도 더 커 보이는 길고 미끈한 청새치였다. 비록 찰나에 불과했지만, 나는 정지된 화면처럼 공중에 떠 있는 그 물고기를 똑똑히 보았다. 


노을빛이 투사되어 분홍빛으로 물든 하얀 배, 

창날처럼 쭉 내뻗은 긴 주둥이, 

부채처럼 우아하게 펼친 좌우 가슴지느러미, 

삼각돛처럼 매달린 세련된 등지느러미와 날렵한 꼬리지느러미, 

미끈하게 빠진 우아한 청새치의 아름다운 몸매에 눈이 부셨다. 

드디어 고기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때 고기가 공중으로 치솟으며 세차게 뿌리치는 강한 탄력에 노인이 오른손으로 잡은 낚싯줄이 튕겨 나가고, 그 바람에 노인은 옆으로 고꾸라지며 돌출된 판자 모서리에 오른쪽 눈썹 위를 찍고 말았다. 그러나 노인은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놓쳐버린 줄을 다시 잡고 큰 소리로 외쳤다. 


― 그래, 고기야. 넌 최선을 다하는구나. 암, 그래야지. 


그러나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 고기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줄도 다시 느슨해졌다. 그때야 노인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떠서 눈썹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씻으며 고기에게 말했다. 


― 그런데 고기야. 인간은 무한한 능력을 가진 고도의 지적영성체(知的靈性體)야. 그러나 대개의 인간은 어리석게도 그 무한한 능력에 스스로 한계를 설정해 버리지. 그러면 그것이 실제로 자신의 한계가 되어버려. 자, 고기야. 비록 지쳤지만, 이제 우리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마지막 승부를 가려보자. 


그 순간, 노인의 말에 응답하듯 고기가 수면 위로 솟구쳐 올라와 온몸을 퍼덕거리며 격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고기의 필사적인 몸짓에 낚싯줄을 잡고 있던 노인의 오른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찢어진 눈썹에서도 다시 피가 흘렀다. 피투성이 노인과 낚싯바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고기와의 마지막 사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고기는 힘없이 꼬리를 내리고 수면 위로 입만 내밀고 뻐끔거리더니 이내 배를 위로 벌렁 드러내고 떠올라 아가미만 간신히 여닫고 있었다. 


― 고기야. 잘 가거라. 하지만 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어. 패배한 것이 아니야. 


노인은 승리한 기쁨보다는 오히려 슬픈 어조로 작별인사를 하면서 노 대신 긴 막대자루가 달린 작살을 들고 고기 몸체 가까이 배를 갖다 붙였다. 그러고는 고기의 아가미와 배가 만나는 삼각지점 중앙에 작살을 내리꽂고는 털썩 배 바닥에 주저앉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노인이 다시 일어나 작살을 빼내자 고기의 심장에서 분출된 피가 수면을 붉게 물들이고, 멀리 서쪽 해안 산마루 하늘에도 그 피가 번진 것처럼 검붉은 노을이 물들어 있었다. 


― 저놈들이 벌써 피냄새를 맡았나 보군. 


노인은 배 위에 서서 멀지 않은 곳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빠르게 다가오는 상어 떼의 삼각지느러미를 발견하고 말했다. 


― 그러나 오늘은 너희들에게 은혜를 베풀 생각은 조금도 없어. 


노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서둘러 고기의 아가미에서 입으로 밧줄을 꿰어서 매듭을 지어 묶고는 밧줄을 끌어당겨 고기를 배 위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 고기야, 제발 좀 빨리 올라와라. 


노인이 촌각을 다투어 끌어당기는 힘에 먼저 고기의 주둥이와 머리 부분이, 이어 몸체 부분이, 마지막으로 꼬리 부분이 배 위로 올라와 툭, 하고 배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전속력으로 달려온 상어 떼도 주둥이로 쿵쿵쿵, 하고 배 옆구리 나무 외판을 들이받았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먹잇감을 놓쳐버린 놈들은 고분고분 물러가지 않았다. 왼쪽에 네 마리, 오른쪽에 세 마리나 되는 녀석들이 여전히 배 주위를 빙빙 돌면서 바로 눈앞에 있는 먹잇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작은 조각배에 노인보다 더 무거운 고기가 실리자 배는 물속으로 쑥 내려앉아 바다 수면이 흘수선 가까이에서 찰랑거렸다. 상어 떼 중 한 놈이라도 수면 위로 뛰어올라 배를 덮치기라도 하면 그놈의 무게까지 더해진 배는 여지없이 전복되고 말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우려와는 달리 노인은 느긋했다. 


― 이놈들아. 너희들은 참 염치도 없구나. 며칠 전에 내 고기를 그렇게 악착같이 뜯어먹고서도 또 왔구나. 그러나 너희들도 어머니 바다의 같은 형제들인데 굶주리게 해서는 안 되겠지. 


노인은 말하고는 작살에 찔린 곳에서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는 고기의 가슴 부분을 먼저 칼로 갈랐다. 고기의 심장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고, 피냄새를 맡은 놈들이 발광하듯 배 옆구리를 쿵쿵쿵, 들이받기 시작했다. 배가 곧 전복될 것처럼 기우뚱기우뚱 흔들렸다. 나는 겁에 질려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노인은 침착했다. 


― 자, 이것부터 먼저 먹으렴. 


노인은 고기의 가슴골에서 아직도 피가 고여 있는 심장과 간을 잘라 꺼내어 최대한 멀리 던졌다. 놈들이 그것이 떨어진 수면으로 몰려가고, 그 틈을 타 노인은 고기의 가슴에서 꼬리 앞 항문까지 배를 가로로 쭉 갈라 내장을 모두 꺼냈다. 


그러나 심장과 간을 먹어 치운 놈들은 이내 다시 몰려들었다. 노인은 꺼내 논 내장의 일부를 칼로 잘라 다시 멀리 던졌다. 놈들이 또 흩어지고, 노인은 이번에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수건을 바닷물에 적셔 고기의 배 속에 고인 피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놈들이 몰려들면 다시 내장 일부를 잘라 멀리 던지고, 놈들이 흩어지고, 그 틈을 타 또 피를 닦아내고, 또 몰려들고, 던지고, 흩어지고, 예닐곱 번 같은 과정이 반복되어 피를 모두 닦아내자 더 이상 놈들은 몰려오지 않았다. 


노인은 그때야 숨을 길게 몰아쉬고 일어나 돛대를 잡고 서서 멀리 서쪽 해안선을 바라보았다. 이제 노을은 해거름에 점점 스러지고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 때맞춰 바람이 불어오는군. 


노인은 손바닥을 펼쳐 들고 바람의 방향을 가늠해 보고는 돛대에 감긴 노끈을 풀어 돛을 펼쳤다. 배 속 내장을 모두 덜어낸 고기의 무게도 한층 가벼워져 돛에 바람을 가득 안은 배는 빠르게 육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돛은 불긋불긋 여러 색깔의 헝겊 조각을 덧대 기워 영원한 패배의 깃발처럼 보였지만, 돛대를 잡고 해안선을 바라보고 서 있는 노인의 모습은 오색 깃발 룽따****가 펄럭이는 히말라야 설산에 서 있는 성자(聖者)의 모습처럼 성스럽게 보였다.



<저자 역주> 


**** 히말라야 설산에서 구도하는 수도자들은 우주의 다섯 원소를 상징하는 청백적녹황 오색 깃발에 불교경전이나 소원을 적어 긴 장대에 매달아 세워 놓는다. 그들은 이 깃발이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기도가 신에게 전해진다고 믿는다. 룽따는 풍마(風馬), 즉 ‘바람의 말’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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