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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도 Jul 12. 2023

모자이크 환상

여섯 번째 환상 // 산티아고 · 언어의 바다(3) 

Poetic Novel & Story Poem

(시 소설 소설시)

모자이크 환상


시와 소설의 경계를 해체하는 순수문학 판타지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문(詩文) 속에 펼쳐지는 경이로운 환상의 세계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새로운 장르가 열린다    


 




여섯 번째 환상 

산티아고 · 언어의 바다(3)


          


 


#2. 언어의 바다     



배가 항구로 들어서면서 노인은 펼쳐진 돛을 감아 돛대에 묶고 노를 젓기 시작했다. 달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고 항구에는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노인이 배를 올려놓는 모래사장 바닷가로 노를 저어 들어갈 때, 소년은 등불을 들고 물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할아버지! 


소년이 반갑게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배는 고기의 무게 때문에 물가에 닿지 못하고 반쯤 물속에 잠긴 채로 바닥에 걸리고 말았다. 노인은 뱃머리에 감아놓은 정박용 밧줄을 풀어 손에 쥐고 큰 걸음으로 펄쩍 뛰듯이 모래사장에 내리고, 나도 노인을 따라 배에서 내렸다. 


노인은 밧줄로 배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소년도 등불을 내려놓고 함께 밧줄을 끌었다. 이윽고 배가 모래사장 위로 끌려 올라왔을 때, 노인은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 할아버지, 이번에도 엄청나게 큰 고기를 잡았군요. 


배로 다가간 소년이 배 바닥을 거의 다 차지하고 대각선으로 길게 실려 있는 큰 고기를 보고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 그래, 어머니 바다가 고마운 선물을 주셨다. 오늘 네가 준 행운 덕분에 상어 떼도 따돌릴 수 있었단다. 


노인은 모래사장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목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런데 할아버지 손도 얼굴도 어깨까지 많이 다쳤어요.


소년이 등불을 들고 다가와 노인의 모습을 비춰보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 괜찮다. 고기와 실랑이를 하다 보면 조금 다칠 수도 있지. 어머니 바다가 금방 치료해 주실 거다. 


노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소년은 등불을 내려놓고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풀어 아직 피가 흐르는 노인의 오른손을 붕대처럼 감싸 매었다. 


― 할아버지, 제가 부축할게요. 


소년이 노인의 오른팔을 들어 제 어깨에 두르며 말했다. 


― 저 돛대를 가져가야 하는데. 


노인이 고개를 돌려 조각배에 꽂혀 있는 돛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 할아버지, 무거운 돛대는 그냥 두고 가요. 제가 내일 챙겨놓을게요.

― 그래, 저렇게 낡은 돛대를 가져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이제 하나씩 버리는 연습도 해야지. 부축하지 않아도 된다. 혼자서 걸을 수 있어. 


노인은 말했지만, 소년의 어깨에서 손을 거두지는 않았다. 


― <테라스>에 가서 주인 마아틴 씨가 알아서 고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저 고기를 골고루 나눠주라고 하렴. 내장을 꺼내고 피도 뽑았으니 육질도 단단하고 맛도 좋을 거야. 이제까지 많은 신세를 졌으니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아야지. 


노인은 어깨동무한 것처럼 소년과 나란히 서서 집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 할아버지, 이마가 불덩이 같아요. 침대에 누워 잠시 쉬고 계세요. 저는 지금 <테라스>에 가서 마아틴 아저씨에게 할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고 우유를 듬뿍 넣은 따뜻한 커피와 빵을 사 오겠어요. 


소년이 노인을 도와 옷을 갈아입히고는 서둘러 오두막집의 문을 열고 나갔다. 얼마나 지쳤는지 노인은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옆에 있으면 노인의 휴식에 방해가 될 것 같았다. 나는 침대 모서리에 개어있는 낡은 담요를 펴서 노인의 몸을 덮어주고 밖으로 나왔다. 

     



해안가에서 가벼운 해풍이 불어왔다. 그사이 달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대왕야자수(大王椰子樹)가 듬성듬성 서 있는 조그만 언덕이 보였다. 나는 그 언덕배기로 올라가 노인의 조각배를 올려놓은 모래사장을 굽어보았다. 야자수 나무 아래 앉아 달빛을 받아 은물결로 반짝거리는 먼바다를 바라보며 노인과 물속 고기와의 대화를 되새겨보았다. 그 말은 고기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노인은 84일 동안이나 액운의 최악의 상태를 의미하는 <살라오(salao)> 신세를 스스로 감수하면서 어부로서의 긍지와 신념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내 처지는 오히려 사치가 아닌가. 


그리고 노인은 항상 바다를 <라 마르(la mar)>라고 생각했다. 노인에게 바다는 생명을 주는 고귀한 어머니였다. 그런데 나는 작가로서 언어의 바다를 어떻게 대하고 있었던가. 이제까지 내 삶의 터전이었던 언어의 바다를 노인처럼 생명을 주는 고귀한 어머니로 여겼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오히려 노인이 <엘 마르>라고 욕한 그 어부들처럼 나는 언어의 바다를 단지 돈벌이 수단이나 명성을 위한 발판 하나쯤으로 여겼던 것은 아니었던가. 


고기는 고기로 태어났고, 노인은 어부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면, 나는 작가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런데 나는 작가로서 단지 돈을 벌거나 명성을 얻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스로 패배감에 빠져 작가의 길을 포기해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노인은 고기와의 대화를 통해 내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내가 글쓰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희망뿐만 아니라 미래의 행운까지 스스로 걷어차 버리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그것은 나의 자유의지와 영혼까지 스스로 파괴하는 더 큰 죄악이라는 것을. 


―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 


언제 왔는지 소년이 등 뒤에 와서 말했다. 


― 그래, 할아버지는 좀 어떠시냐?

― 따뜻한 우유커피와 빵을 좀 드시고 막 잠이 드셨어요. 


소년이 내 옆에 나란히 앉으면서 말했다. 노인의 조각배가 올려진 모래둑에서 멀지 않은 바닷가 기슭에 노인이 잡은 대어의 긴 등뼈가 보였다. 


― 할아버지께서 선생님께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언어의 바다를 두려워하지 말라고요. 그 바다에서 대어를 잡지 못한다고 자책하지도 말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갑자기 울컥하며 저절로 눈물이 핑 돌았다. 


― 그랬구나. 할아버지께 고맙다고 전해드려라. 


그러나 나는 내색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 할아버지께서 이 말도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어부는 어머니 바다와 하나가 되어야 하고, 작가는 언어의 바다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요. 선생님의 이번 작품은 언어의 바다와 하나가 되기 위한 또 다른 진통이고, 선생님의 영혼에서 언어의 영혼이 더 크게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라고요. 선생님의 한계가 아니라고요. 


그 순간 나는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진통을 느꼈다. 그 진통이 머릿속에서 불꽃처럼 터지면서 뇌세포 하나하나가 하얀빛의 조각이 되어 언어의 바다에 소나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나의 빛이 하나의 자음이 되고, 하나의 빛이 하나의 모음이 되고, 그 자음과 모음이 서로 사랑하여 글자가 되고, 글자와 글자가 서로 사랑하여 단어가 되고, 단어와 단어가 서로 사랑하여 문장이 되었다. 그 문장과 문장들이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면서 끝없이 펼쳐진 무한한 언어의 바다에서 거대한 해일처럼 가슴속으로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 선생님, 제가 부탁 하나 드릴게요. 


내 가슴속 회오리가 어느 정도 잦아들었을 때, 소년이 문득 말했다. 


― 으응? 부탁? 


나는 소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반문하듯이 말했다. 소년은 바닷가 기슭에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는 대어의 긴 등뼈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 선생님, 저 아래 할아버지가 잡은 대어의 등뼈가 보이세요? 

― 그럼, 저 아래 바닷가 기슭에 있구나. 

― 선생님 저 뼈를 가져가세요. 저 뼈는 선생님을 위해서 일부러 남겨둔 거예요. 

― 무슨 말인지 나는 잘 이해할 수 없구나. 


―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요. 어부는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죽이지만, 작가는 그 죽은 고기를 다시 살려내는 사람이라고요. 상어 떼에게 뜯겨버린 저 대어의 앙상한 뼈다귀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작가만이 할 수 있다고요. 선생님께서 저 뼈를 가져가셔서 뼈에 생살을 붙이고 피를 돌게 하여 다시 살려내 주세요.


― 내가 저렇게 큰 등뼈를 무슨 힘으로 가져갈 수 있겠니. 그리고 내가 작가이긴 하지만 네 말처럼 정말 죽은 생명을 다시 살려낼 능력이 있을지는 의문이구나. 


― 선생님은 할 수 있어요. 선생님은 무한한 창조력을 가진 작가이시고 누구보다 더 순수한 창조에너지를 갖고 계세요. 그 창조에너지는 죽은 생명도 다시 살려낼 수 있어요. 선생님에게는 그 순수한 창조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과 차원을 초월하여 오늘 여기까지 오실 수 있었어요. 방금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고 저도 알 수 있었어요. 


 그래, 그 창조에너지는 돈벌이나 명성을 위한 것이 아니겠지. 오늘 할아버지가 하신 것처럼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바칠 때만 나오는 것이겠지. 창조의 목적이 오로지 돈벌이나 명성을 위한 것이 될 때 그 순수한 창조에너지는 변질되어 버릴 거야. 그래, 이제 알 것 같구나. 오늘 할아버지와 네게 정말 소중한 것을 배우는구나. 


― 아뇨. 저는 아직 더 배워야 하는걸요. 할아버지께서 많이 편찮으세요. 이번에는 좀 오래갈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할아버지를 지키고 돌봐드릴 거예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소년이 돌아가자, 노인이 잡은 대어의 긴 등뼈가 있는 바닷가 기슭에 달빛보다 더 밝은 하얀빛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방금 내 머릿속을 불꽃처럼 환하게 비추던 언어의 빛이었다. 나는 모래사장으로 내려가 그 등뼈가 있는 곳으로 갔다. 나는 그 등뼈를 두 손으로 들어보았다. 그것은 길고 컸지만, 의외로 가벼웠다. 나는 그것을 노인이 돛대를 어깨에 메는 것처럼 어깨에 메고 다시 돌아오는 책 속의 길로 들어섰다. 


어머니 바다의 젖가슴 내음을 품은 멕시코 만류의 해풍이 불어오는 그 길 위에서 나는 노인의 오두막집 정경을 그려 보았다. 잠들어 있는 노인의 침대 머리맡에 앉은 소년이 노인의 이마에 물수건을 갈아주고 있었다. 


나는 편안하게 잠든 노인의 얼굴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노인은 이제 사자의 꿈을 꾸고 있지 않았다. 노인은 이제 대어의 꿈을 꾸고 있었다. 황혼이 물든 바다에 거대한 물고기 한 마리가 수면을 박차고 나와 공중으로 힘차게 치솟아 오르고, 노인과 소년은 조각배 위에서 어깨동무를 한 것처럼 나란히 앉아 그 대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과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 그 대어는 내가 노인의 바다에서 가져온 그 대어의 긴 등뼈에 생살을 붙이고 피를 돌게 하여 다시 살려낸 바로 그 대어였다. 노인의 바다에서 잡혀 죽은 그 대어에 내가 순수한 창조에너지로 생명을 불어넣어 그 바다로 다시 살려 보낸 바로 그 대어였다.           


          




톡톡, 노크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서재에서 내 신작소설 속의 메타버스를 상상하면서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책상에 엎드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꿈속인지, 소설 속 메타버스인지 혼란스러웠다. 서재의 문이 열리며 아내가 들어섰다. 


― 여보, 새벽 세 시가 넘었어요. 응, 노인과 바다? 이렇게 깨알 같은 글씨로 된 옛날 책을 다시 보고 있었어요? 그래,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만났어요? 아, 알겠어요.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죠. 희망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죄악이다. 맞죠? 


꿈속 메타버스에서 나의 아바타(avatar)가 산티아고 노인과 소년 마놀린을 만났던 것일까? 아내의 말에 방금 꿈속의 일이 직접 겪은 현실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내가 의자 뒤에 서서 내 어깨를 꼭 껴안고 귓속말처럼 말했다. 


― 여보, 요즘 당신 힘드신 줄 알아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이제 애들도 다 컸고, 생활은 내가 꾸려갈 수 있어요. 아무도 당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당신을 믿어요. 애들도 아빠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데요. 자, 이제 좀 주무세요. 


나는 아내의 손에 이끌려 침대에 누웠다. 편안했다. 나는 이불속에서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늘 밤에는 나도 노인처럼 사자의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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