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신 설에게 겁을 내면서도 출판사 대표로서 소임도 할 수밖에 없는 김도겸이 불쌍했다가 본인이 죽도록 싫어하는 자리에 소처럼 끌려가 연신 또 웃어대는 한 설이 불쌍했다가... 그 둘을 불쌍해하는 자기 자신이 제일 불쌍한 인간인 것 같아 또 자신이 불쌍했다가... 우리 모두는 어둠의 자식이요... 를 마음속으로 삼세 창을 한 후 노트북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김도겸은 설과는 대학 동기다.
일찌감치 그녀의 필력을 철학수업 리포트를 통해서 알아본 김도겸은 그녀를 상대로 창대하고도 번뜩이는 계획을 대학 시절부터 세웠다.
어떻게든 그녀를 꼬이고 달래고 부추겨서 글을 쓰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
워낙 창의력이 풍부한 그녀는 유독 철학수업 시간에 두각을 나타냈고 그녀의 리포트에 적혀있는 음습하고도 질퍽한 문장들은 철학 교수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으며 김도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흘러넘쳤다.
설은 불같이 급하면서도 한없이 낙천적이었고 몹시도 예민하면서도 여린 마음씨를 지녔으며 그러한 그녀의 성격 때문인지 그녀의 글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기 일쑤였다.
또한 내성적이면서 폐쇄적인 그녀의 성향 탓에 그녀 또한 말보다는 글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를 즐겼고 그런 그녀를 옆에서 이용하기도 하고 지켜주고 싶기도 한 김도겸은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10년 가까운 시간을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녀가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그녀 옆을 지키고 있었다.
고백은 꿈도 꿔 본 적이 없다.
고백했다면 본인은 이미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었다고 스스로 확신했다.
언제나 그녀의 친구로 때로는 출판사 대표로 옆에서 자리를 지키다가 언젠가 그녀가 알아봐 주기를 바랐다.
설과는 반대로 김도겸은 외향적인 성격에 서구적이고 남자다운 외모로 비즈니스면에서는 최상의 조합을 이루는 남자였다.
빠른 상황판단력과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눈치로 설의 첫 단편집인 「미치지 않기 위한 싸움」을 한순간에 문학세계에 등단시켰고, 폐쇄적이고 내성적인 성격과 여리면서도 도도한 설의 외모를 이용해 신비스러운 작가로 설의 이미지를 한순간에 만들어냈다.
그녀 내면의 소용돌이와 피어오른 불씨들이 가득 담긴 단편집은 그녀가 어떠한 사람인지 궁금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그런 그녀의 외모를 본 뭇 남성 팬들은 그녀의 매력에 한순간에 빠질 만큼 설은 신비스러운 새벽 해무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이 모든 이미지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 바로 김도겸이다.
그는 대학 시절 설이를 처음 본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그녀의 작품 못지않게 그녀 또한 이미지화했고 예상한 대로 그런 그녀의 매력에 빠진 남자들이 물밀 듯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녀의 시원시원하고 새침함 없는 털털한 매력에 의도치 않게 여자 팬까지 생겼다. 설은 작가이지만 여느 작가와는 다른 스타성을 가지고 있었고 이 또한 김도겸의 작품이다.
김도겸은 가끔 본인의 작품인 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언젠가 그녀의 남자로 그녀 옆자리에 서기를 꿈꿨다.
물론 정작 그녀는 자신의 창대한 꿈을 일도 상상하지 못한 채 양반다리 자세로 글만 쓰고 있지만 그는 언젠가는 그녀의 남자가 되어있을 자신을 생각하며 또 확신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정말 그럴 줄 알았다...
김도겸은 양복 안쪽 주머니에서 오랜 듯 바랜 손수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가지런히 접혀 있는 손수건 가장자리는 파란색 실로 수놓아져 있었고 접힌 부분의 한쪽 귀퉁이에는 작고 여린 새 한 마리가 노랗게 수놓아져 있었다.
손수건을 보며 김도겸은 그날을 잠시 회상했다.
‘오~~ 컨버스 하이~ 저 아이템 소화하기 힘든데... 일단 종아리가 길어야 어울리는데... 꽤 잘 어울리는걸?’
대학 축제가 한 창이던 5월의 푸르던 날.
김도겸은 철학수업을 듣기 위해 행복관으로 이동 중이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가벼운 걸음으로 교정을 걸어가던 중 문득 자신의 앞에 걷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하얀색 컨버스 하이를 신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연한 색 청치마에 흰 셔츠를 단정히 입고 에코백을 어깨에 멘 채 걸어가는 긴 갈색 머리의 여자. 문득 그녀의 얼굴이 궁금해지던 찰나였다.
‘툭’ 그녀의 걸음 뒤로 먼가 가 떨어졌다.
가까이 걸어가 보니 하얀색 손수건.
앞에 걸어가던 컨버스 하이의 그녀가 떨어뜨렸다. 김도겸은 손수건을 집어 들고 그녀를 불렀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거리인데도 그녀는 듣지 못한 채 계속 걸어가고 있었고 김도겸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아... 컨버스 하이의 여자여...
얼굴 또한 하이 클래스네...’
김도겸은 돌아보는 그녀, 한 설의 얼굴을 본 순간 그대로 얼어버렸고, 그런 김도겸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며 한 설은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네?”
김도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가 떨어뜨린 손수건을 그녀에게 건넸다.
“손수건 떨어뜨리셨어요... 직접 만든 물건인 거 같은데...”
김도겸이 들고 있는 손수건을 보던 설은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지자 당황하며
“아니에요... 제 꺼.”
라는 말을 해버렸고.
설의 것이 분명한데 아니라고 하는 설의 말이 또 당황스러운 도겸은
“그쪽 주머니에서 떨어지는 거 봤는데요?”
라는 도겸의 말에 설은 이제 확실히 얼굴이 붉어지며
“버... 버린 거예요.. 그러니 이제 제 꺼 아니에요.”
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던지고는 휙~ 돌아, 가던 길을 급히 가버렸다.
어찌나 빨리 휙 돌았는지 그녀의 긴 머리카락에 그대로 뺨을 얻어맞은 도겸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얼빠진 얼굴로 멀어져 가는 그녀를 바라봤다.
‘왜 저래... 내가 무섭나?
본인 물건은 맞는데 순간 버렸기 때문에 본인 물건이 아니다? 이 무슨 개뼈다귀 같은 논리야...
그나저나.. 종아리 참 곧다. 발목 참 가느다랗다. 누구지?’
한참 그녀를 보며 손수건을 가방에 넣었다.
컨버스 하이의 그녀는 행복관 안 강의실에 앉아있었다. 김도겸은 조용히 파이팅을 외치며 그녀 뒷좌석에 앉아 그녀의 긴 갈색 머리카락을 태울 듯이 쳐다보았다.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한참 보다가 다시 양복 주머니에 넣으며 도겸은 한쪽 뺨을 만졌다.
10년 전 설과의 첫 만남에서 의도치 않게 설에게 맞은 뺨을 어루만지며 피식 웃었다.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옴에 감사하며 그녀가 그토록 싫어하는 외부 행사에 항상 끌고 감을 미안해하며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