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건 술을 마실 때도 통용된다. 내가 아무리 술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한다고 한들, 진짜 술꾼들이 마시는 만큼 마실 수도 없거니와, 그들이 사랑하는 만큼 술을 사랑하기도 참 어려운 일이다. 간이 튼튼한 '간수저'들, 프로재능러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오늘은 취재하면서, 살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이 사람 진짜 술꾼이네!"라고 싶었던 몇 가지 순간을 떠올려봤다.
1. 지금은 퇴사한 회사 동기 H
회사 동기 H는 외형만 봤을 때는 '술통' 그 자체였다. 거구의 체격에 탄탄한 몸. 저런 사람이 술 안 마시면 도대체 술을 누가 마시겠나 싶을 정도의 덩치였다. 그 역시도 본인이 술통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술을 좋아했는데, 술이 없으면 글이 나오겠냐, 술을 마실 때가 가장 좋다라는 말부터 "나는 술 마신 후 숙취마저 기분이 좋다"고 말할 정도로 술을 사랑했다. 그의 또다른 특징은 절대 안주발을 세우지 않는다는 거였다. 함께 술을 마실 때면 내 앞의 안주만 쏙쏙 사라지고, 그의 앞에는 빈 술병만 쌓여갔다. 사람들이 그가 밥 먹는 모습을 보면서 저거밖에 안 먹으면서 어떻게 저런 체형을 유지하나 참 궁금하다고 말하곤 했다.
2. 베스트셀러 작가 E
E 선생님은 이름을 말하면 전국민이 다 아는 베스트셀러 작가다. 여성 분이시며, 전세계로 번역된 책이 팔려나갈 정도로 유명하다. 어쩌다 그분과 사석에서 식사할 자리가 생겼다. 워낙 섬세한 문체를 쓰셔서 술을 좋아하실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저희 술도 한 잔 할까요 하면서 먼저 운을 뗐다. 함께 동석한 동료 작가인(마찬가지로 유명한) Y 선생님은 "어째 안 마시나 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고 보니 E선생님은 문단계에 술 모임(?)을 할 정도로 유명한 술꾼이시라고. 술병을 잡으시자 수줍었던 모습은 싹 사라지고 '짠'을 외치며 분위기를 주도해나갔다. 다른 사람의 잔이 비진 않았는지 끊임없이 챙겨주며. 깜짝 놀란 다른 기자가 "술을 이렇게나 좋아하시는 줄 몰랐다, 평소에 술을 얼마나 드시는 거냐"라고 묻자, 작가님 말씀. "술은 일기처럼 먹는 거지요"
3. 양평의 B양조장 대표 아버지인 J선생님
양평 B양조장은 정말로 경치가 빼어난 양조장이었다. 다녀본 양조장 중 손꼽을 정도. 여기는 아버지와 아들(대표)이 함께 양조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인 J선생님이 정말...찐술꾼이셨다. 두분 부자는 사이가 참 좋았다. J선생님에게 아드님이 자랑스러우시겠다고 여쭤봤는데, 허허 웃으시며 그렇다고 하셨다. 그리고 어디선가 머그잔과 막걸리를 꺼내오시더니 기자에게 한잔 권하셨다. '헐 너무 맛있다'고 생각하고 J선생님을 바라보니, J선생님은 아들 자랑할 때보다 더 흡족하게 웃으시며 "맛있죠~?"라고 말하셨다. 그러더니 머그잔에 한번 더 따라서 술을 권하셨다. (이때는 너무 맛있어서 주량 생각 못하고 마셨지만 나중에 후회함) 그 표정이 너무 행복해보이셨다. 기분 상하지 않는 더 먹고 가라, 저녁 먹고 가라는 권유, 아직도 그 행복한 '찐술꾼' 표정이 안 잊혀진다. 참고로 그때 마신 막걸리는 포천이동막걸리.
4. 군산 S양조장의 Y대표님
군산 S양조장의 Y대표님은 개인적으로 나중에 술 한잔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분이다. 긍정적인 에너지도 에너지인데, 술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취재가 아니었으면 "언니"라고 부르고 싶었던 대표님이다. Y대표님은 찐술꾼의 상징인 '고도주'를 즐기는 편이었다. 본인도 나중에 맛있는 고도주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Y대표님은 오랜 기간 숙성한 '비장의 술'을 선물해주셨는데, 바로 흑염소주다. 나중에 사위 있음 주고 싶은 술이라며 꺼내놓으셨는데 정말 너무 맛있었다. 아직도 몸이 추운 날이면 아껴놓고 한 모금씩 마시는데 여전히 맛있다. 찐술꾼만 내놓을 수 있는 자기만의 술. 그런 술을 술찌인 내게 내어주셔서 감사하다.
5. 친구 P
이 친구는 혼술을 즐긴다. 혼술로 소주 세병. 나는 단 한번도 혼술로 소주를 마셔본 적이 없는데, 이 친구는 좋은 안주가 있으면, 고민거리가 있으면 방 안에 술판을 깔아놓고 혼자서 술을 마신다. 여느 술꾼이 그렇듯 특별히 안주를 많이 먹지도 않는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술잔을 기울인다. 찐술꾼이라고 해서 같이 마실 때 강권하지도 않는다. 이 친구와 술 자리가 편한 이유는, 정말 술찌인 내 템포에 맞춰서 술을 마시면서도 술이 들어가야 이야기할 수 있는 고민거리를 자연스럽게 풀어놓게 만든다는 점. 무슨 마법에 걸린 것처럼 이야기 하지 않으려고 했던 고민거리도 이 친구 앞에서 술 먹다가 털어 놓은 적이 많다. 역시 술 자리는 어떤 술을 마시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랑 마시느냐가 참 중요하다는 걸 알려준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