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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돌 기자 Nov 01. 2021

첫술의 기억

누구에게나 첫사랑이 있듯, 첫술도 있다

첫술은 중2병과 함께

나의 첫술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알쓰치곤 너무 빠른 첫술이다. 발랑 까진 편도 아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앞머리 없는 똑단발의 촌스러운 모범생이었다. 멋이라곤 부릴 줄도 몰랐다. 그런데 이놈의 중2병이 문제였다.

내 친구 H는 나에게 매일 술을 마셨다고 자랑했다. 사실 중학생이 술을 마셔봤자 얼마나 마셨겠는가. 수학여행 때 프링글스통에 숨겨온 소주 한 병을 반 친구들 40명이서 나눠 먹는다거나, 본인 집에 있는 담금주를 홀짝 홀짝 훔쳐먹었던 게 다였지만, 그때 당시 나는 그 모습이 반항적이고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친구 H를 꼬셔서 술을 마시자고 설득했고, 같이 어울리는 친구 J와 K 둘을 더 불러다가 우리집에서 술을 마시기로 했다.

학교가 일찍 끝난 날, 친구들은 우리집에 모였다. 술은 J가 구해왔다. J는 편의점하는 집 딸이어서 술 구하기는 쉬웠다. 소주는 잎새주. 도수는 19.8도. 그 시절 소주는 그랬다.

중2병에 단단히 걸린 넷은 J가 구해온 술을 가운데에 두고 둘러 앉았다. 그리고 어떤 의식이라도 하듯 동시에 잔에 소주를 따라놓고 서로를 한참 쳐다보다가 '하나, 둘, 셋' 구호와 함께 마셨다. 술은 훅 하고 들어가서 꿀꺽 하고 삼켜졌다. 술을 마시기 전에는 정말 많은 로망이 있었는데, 술을 막상 마시니깐 '이게 술이라고?' 싶었다. 독하고, 맛 없고, 먹은 것을 후회한. 친구들 사이에선 조금 세보이려고 술을 즐기는 척 했지만, 아무리 마셔도 좋아지질 않았다. 그와중에 술 먹은 것을 어머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친구들과 술 한병을 '뚝딱(?)' 하고 근처 운동장을 돌았다. 술 냄새가 빠지라고 열심히 뛰었다. 맛도 없고, 멋도 없었던 내 첫술의 기억이다.


첫술은 어른에게

'첫술은 어른에게 배워라'는 말이 있다. 어른한테 술을 배우면 대부분 나이가 차서 먹는 데다가, 술에 관한 예절도 알 수 있고, 주량도 가늠할 수 있고, 함부로 주사를 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온 말이다. 보통 치기어린 첫술을 마시면 주량을제대로 몰라서 실수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첫사랑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것처럼, 첫술도 중학교 2학년 때 나처럼 뚝딱 헤치우면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아버지는 딸이 중2 때 술을 마신 줄은 모르고, 대학교 입학하고 나서 나와 맥주를 한 잔 하시며 감격해하셨다. 아버지도 술은 잘 못하셨는데 딸이랑 맥주를 마시면서 인생 이야기를 하는 게 퍽 뿌듯하신 거 같았다. 곰곰 생각해보면 나에게 수입맥주를 먹는 재미를 알려준 건 아버지이셨다. 그뒤로 아버지와 술을 자주 마시진 않았다. 영화볼 때 아버지가 수입맥주를 잔에 따르면 옆에서 홀짝 거리는 게 전부였다. 어른이 되고 내가 술과 맞지 않는 사람인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술을 마시는 시간도 조금 더 가질 걸 그랬다. '첫술은 어른에게'라는 말은 오히려 어른이 되니까 와닿는다. 살면서 술을 마실 일도, 날도 너무 많기 때문이다. 굳이 중2 때 부랴부랴 마시지 않고, 어른에게 천천히 배워도 좋은 게 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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