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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4]우물물 긷는 일
내 일일까?
by
할수 최정희
Nov 15. 2022
친구가 동네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다.
두레박을 우물 속으로 내려보낸다.
두레박에 물이 그득 찬다. 들어 올린다. 양동이에 붓는다.
양동이에 담긴 우물물이 찰랑인다.
친구가 물 양동이 두 개가 걸린 물지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일어선다.
양동이가 기우뚱한다. 양동이의 물이 넘쳐 흐른다.
"힘들어서 어떡해?"라는 내 말에 친구가 대답한다.
"'내 일'인데 뭐." 이 대답. 불화살이었다.
45년 전 친구들을 만나러 고향에 갔다.
밤새워 친구들과 한 이야기들은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이 친구의 대답. '내 일'은 낙관처럼 마음속에 찍혀있다.
우물물 긷는 일이 제 일이라니.
엄마 생각이 났다.
우물물 긷는 일은 당연 엄마의 일이었다.
우물물 긷는 일뿐 아니라 집안일 모두 엄마 일이었다.
'내 일'이 뭘까 생각해 보았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올리는 일 같은 일을 '내 일'이라 여기며 살 수 없을 것 같다.
마당에 우물이 있었다. 엄마가 우물 속을 청소했다.
돌을 쌓아 만든 우물이었다.
우물에 있는 물을 다 퍼내고 난 뒤 엄마가 돌을 딛고 우물 바닥으로 내려갔다.
난 우물 위에서 엄마를 지켜보았다.
엄마가 우물 벽에 낀 이끼를 긁어내고 바닥의 나뭇잎을 주워 두레박에 담았다.
나는 두레박 줄을 잡고 두레박을 들어 올렸다.
우물 속을 청소하는 엄마를 지켜보는 내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엄마가 돌을 딛고 오르내릴 때 미끄러질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우물 속의 엄마를 지켜보면서 이끼와 나뭇잎이 담긴 두레박을 들어 올리는 일은
신비로운 동화 속 나라 여행이었다. 엄마에게도 그랬을까.
결혼생활 내내,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러 올리는 일 같은 일을 해왔다.
이 일은 아름다운 동화 속 나라를 여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재투성이 신데렐라로 전락하는 일이었다.
재투성이가 되었지만 요정은 찾아오지 않았다.
세상에는 재를 뒤집어쓴 사람이 많은가 보다.
요정이 나를 찾아오길 기다릴 수 없다.
신데렐라에게 유리구두가 필요했던 것처럼 '내 일'을 찾아 길 떠나는
내게도 유리구두가 필요하다.
'내 일'이라는 45년 전에 꽂힌 불화살. 아직 타고 있으니
유리구두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구할 수 없으면 내가 만들 것이다.
유리구두에 나를 왕궁에 데려줄 기능은 필요치 않다.
왕자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라.
'내 일'을 찾으러 가는 길이니까.
내 발에만 맞으면 된다.
내 발에 딱 맞는 유리구두를 신으면 어딘 들 갈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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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수 최정희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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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
나의 중년은 청춘보다 아름답다
저자
산림청, 현대 산림문학 100선 도서 내게 걸어 온 말들 (설렘) 작가. 나의 중년은 청춘보다 아름답다(공동집필), 에세이작가, 20년 차 숲해설가, 생태공예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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